100년 전 두 천재의 발견 기리는 뜻
하이젠베르크 vs 슈뢰딩거
“자연은 확률적으로 존재
신의 뜻에 참견하지 말라”
하이젠베르크 vs 슈뢰딩거
“자연은 확률적으로 존재
신의 뜻에 참견하지 말라”
하이젠베르크(왼쪽)과 슈뢰딩거(오른쪽). 이 둘은 100년 전 양자역학의 기본 토대를 만들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1932년과 193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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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양자역학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유엔은 이를 기리기 위해 올해를 ‘양자의 해’로 지정했다. 100주년이라니 축하할 일이지만, 뭐가 뭔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제대로 축하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세계가 축하한다는 데 빠지긴 섭섭하니, 기본적인 건 알고 가는 게 좋겠다.
100년 전인 1925년은 양자역학의 태동기라고 불린다. 하이젠베르크가 행렬 역학을 만들어 수학적 기초를 세우고, 슈뢰딩거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틀을 만들었다.
경찰: “지금 이 차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압니까?”
경찰: “당신은 방금 시속 150km로 달렸어요.”
하이젠베르크: “젠장. 이제 길을 잃었군.”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트렁크 내부를 조사하고 슈뢰딩거에게 물었다.
슈뢰딩거: “이제 우리도 알아!”
물론 허구인 이 농담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만든 양자역학 이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일단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는 한 차를 탈 리가 없다. 이 둘은 물리학계의 유명한 라이벌이자 앙숙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천재, 하이젠베르크
양자역학에 대해 토론하는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슈뢰딩거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싫어해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었다. 구글 이미지FX로 생성한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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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깜짝 성장한 무언가를 설명할 때 ‘양자적 도약’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표현은 당연히 양자역학에서 비롯됐다. 우리 모두 중학교에서 원자 구조를 배웠다. 원자핵이 한가운데 있고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는, 태양계 같은 모형이다. 닐스 보어는 전자들이 일정한 궤도를 갖고 원자핵 주변을 돈다고 생각했다.
전자는 궤도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궤도에 있다가 그 다음 궤도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양자적인 도약’이란 이런 표현이다.
보어는 처음에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설명해내는 수식도 만들지 못했다. 이 문제를 자기 수업을 들었던 영특한 학생인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고민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보다 16살이 어렸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 궤도 자체를 의심했다. 전자 궤도를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전자가 움직이는 걸 본 적은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도대체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우리가 전자에 관해 관측할 수 있는 건, 전자가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할 때 내뿜는 빛이 유일하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빛에 주목했다. 빛의 진동수와 진폭을 이용해 행렬 형태의 수식을 만들었다.
이 수식은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시각화하지 않는다. 다만 이 수식은 전자의 에너지 상태, 방출하는 빛의 스펙트럼을 정확히 예측했다. 행렬역학의 탄생이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양자역학을 싫어한 양자역학의 영웅,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구글 이미지FX로 생성한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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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는 행렬역학을 싫어했다. 물리학은 자연을 설명하는 학문인데, 전자의 움직임을 그려내지 못하는 이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자를 입자로 봤던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슈뢰딩거는 파동으로 여겼다. 그리고 기존의 물리학에서 사용하던 파동방정식으로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표현했다. 그 방정식이 바로 유명한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당대 물리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기존 이론에서 파생되었고, 무엇보다 전자의 상태가 그림으로 그려졌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사용하면 전자가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지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흥미로운 건, 행렬역학과 슈뢰딩거 방정식이 가리키는 결론은 같다는 점이다. 전자를 입자로 보든 파동으로 보든, 양자의 세계는 불연속적이다. 행렬역학이 싫었던 슈뢰딩거가 결과적으로는 행렬역학을 뒷받침한 셈이다.
슈뢰딩거는 행렬역학 자체도 싫어했지만, 행렬역학의 결론도 싫어했다. 행렬역학으로 계산하다보면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가 나온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측정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려면 대상과 충돌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와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입자는 너무 작기 때문에 빛이 충돌하면 위치와 운동량을 달라진다. 적어도 위치와 운동량 중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입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같은 물리학자들은 더 나아가 “입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게 아니라, 자연 자체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관측하기 전에는 여러 확률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 해석은 안다는 건 무엇인지, 본다는 건 무엇인지, 실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이끌어냈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여기서 나왔다. 확률이 중첩된 상태라는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한 슈뢰딩거는 하나의 사고실험을 한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입자에 반응하는 독가스를 함께 넣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말대로 입자가 있으면서도 없다면, 독가스도 있으면서도 없다.
그럼 고양이도 살아있으면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과 죽음의 중첩된 상태, 모순이다. 슈뢰딩거는 이를 비꼬기 위해 이 사고실험을 소개했으나, 역설적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비유가 됐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이 해석을 끝까지 반대했다. 여기에는 아인슈타인도 포함된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없는 것인가” 등 유명한 말을 남긴다. 보어의 반박도 인상적이다. “신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 자연을 인간의 직관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날 양자역학 교과서에는 “입 닥치고 계산 먼저 해라”는 명언이 적혀있다.
납득하기 어려운가. 축하한다. 당신은 아인슈타인과 동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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