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20 (월)

[만물상] 사설 소방대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러스트=박상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부 테네시주(州)에 있는 오비언 카운티는 서울(605㎢)보다 2배 이상 넓은 1437㎢의 면적에 약 3만명밖에 살지 않는다. 2010년 9월 이곳에 사는 진 크래닉의 집에 불이 났다. 크래닉은 911에 전화를 했지만, 소방차는 오지 않았다. 오비언 카운티에는 카운티 전체를 관할하는 소방본부가 없고, 소도시들이 각자 소방세를 걷어 ‘자치 소방서’를 운영한다. 시(市) 경계선 밖의 주민들은 인근 도시에 ‘소방 정기요금’을 내야 하는데, 크래닉이 연간 75달러의 정기요금을 미납한 사실이 확인돼 출동을 거부당한 것이다. 불이 번지자 소방대가 출동했지만, 요금을 완납한 옆집 불만 끄고 돌아갔다. 크래닉의 집은 전소되고 말았다.

▶미국연방재난관리청(FEMA)에 따르면 미국의 91%엔 정부 등록 소방본부가 있다. 나머지 9%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사설 소방 회사들이다. 이들은 소방서가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정기요금을 받고 불이 나면 출동해준다. 지방 정부가 소방세나 정기요금을 받다 보니 아예 사설 회사를 찾는 경우도 있다. 소규모 지자체나 리조트, 산업 단지의 소방 업무 대행도 한다. 크래닉의 사례가 논란이 됐을 때도 미국엔 “돈을 안 내도 불을 꺼주면 누가 돈을 내냐”는 여론이 있었다.

▶사설 소방대의 역사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 정치를 했던 크라수스는 사병 500명으로 소방대를 조직했다. 불이 나면 현장에 출동해 고액의 진화료를 요구했다. 돈을 내면 불을 꺼주지만, 요금 협상이 결렬되면 방치했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번 크라수스는 당대 로마 최고의 부자였다.

▶런던 시내의 85%를 잿더미로 만든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 보험 회사들은 자체 소방대를 조직했다. 보험 가입자 집의 외벽에 ‘파이어 마크(fire mark)’라 불리는 명패를 부착하고, 불이 나면 소방대를 보내 명패가 붙은 집 불만 꺼줬다. 지금도 사설 소방 회사들의 가장 큰 고객은 대형 보험 회사들이라고 한다. 프리미엄 화재보험에 가입한 거부(巨富)의 집 주변에 불이 나면 보험 회사가 사설 소방대를 보내 진화한다.

▶로스앤젤레스(LA) 부촌에서 대형 산불 피해가 계속되자, 부유한 주민들이 하루 1만달러(약 1470만원) 이상 드는 사설 소방대를 서로 부르려고 난리라고 한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퍼시픽 팰리세이즈 지역에서도 사설 소방대가 지킨 쇼핑몰은 멀쩡했다. 기후변화로 산불이 잦아지는데, 화재 진압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갈라지는 미국인 것 같다.

[김진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