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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김용현과 차지철의 공통점…콤플렉스, 군 지휘 욕심,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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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9월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용현 신임 국방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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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8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국방부 국정감사장,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용현 국방장관과 여인형 방첩사령관이 충암고 선후배 사이인 점을 들어 “충암고 기운이 넘친다”며 “장관께서 여 사령관 (비호)하는 것을 보면 전두환·차지철 같아서 아주 좋다”고 비꼬았다. 이에 김용현 장관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비아냥거리는 답변으로 맞불을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권력 2인자로 전횡을 일삼다 1979년 10·26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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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최측근이던 김용현과 차지철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닮았다.



첫째, 콤플렉스다. 차지철(1934~1979)은 고졸 장교였다. 차지철은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1953년 육군 소위가 됐다.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은 1950·60년대 부족한 장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고졸 이상 학력을 가진 20살 이상 남자를 뽑아 열달 전후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차지철은 대위 시절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장군의 경호장교로 활동하다 1962년 중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차지철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1974년 8월 대통령 경호실장이 됐다.



그는 경호실장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권력 2인자로 군림했다. 차지철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데다 중령으로 특별 진급과 동시에 전역해, 실제 군 지휘관 경험은 중대장(대위)에 불과했다. 학력과 군 경력이 부족했던 차지철은 육사 출신 장군들에게 열등감을 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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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장군에게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노 장군은 진급과 함께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됐다. 왼쪽 끝에 전두환 전임 작전차장보가 고개를 돌려 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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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은 이 열등감을 자기보다 나이 많은 육사 출신 장군들을 부하로 부리면서 풀려고 했다. 그는 현역 육군 중장을 부하인 경호차장으로 두고 매일 거수경례를 받았다. 전두환 소장을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앉힌 후 그 후임으로 노태우 소장을 데려왔다. 육사 11기인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나이가 세살 많았다.



김용현은 대장 진급을 못한 게 콤플렉스다. 그는 육사 38기 동기생 가운데 중장 진급까지는 선두주자였다. 그는 대장 진급 0순위로 꼽히는 수도방위사령관-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을 지냈다. 주변에선 그의 대장 진급을 따놓은 당상으로 여겼지만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9월 장성 인사에서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유력한 합참의장(대장) 후보였다. 청와대 인사 검증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김용현은 대장 진급에 실패하고 2017년 11월 중장으로 전역했다.



그는 윤석열 대선 캠프에 들어가 윤석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자리잡았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경호처장이 됐고, 군 내부에선 김용현 경호처장이 국방부 장관 위에 군림한다는 뜻으로 ‘국방상관’이라고 했다. 군 인사 때마다 “김용현이 군 인사를 좌우했다”는 말이 돌았고 “대장 진급에 실패한 김용현이 대장 출신은 국방장관을 안 시킨다”는 말도 나왔다. 실제 윤석열 정부 국방장관 3명(이종섭 육사 40기, 신원식 육사 37기, 김용현 육사 38기)은 모두 육군 중장 출신이다. 문재인 정부 때 송영무(해군 대장), 정경두(공군 대장), 서욱(육군 대장)을 비롯해 이전 정부들 국방장관은 대부분 대장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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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 행사장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장관이 박수를 치고 있다. 대통령실 누리집 갈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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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차지철, 김용현은 민간인 신분이면서도 군을 지휘감독하려는 욕심을 부렸다. 차지철은 1978년 12월 수도경비사령부설치령을 개정해 제4조4항에 ‘사령관은 특정경비구역과 관련된 작전활동에 대하여는 대통령경호실장의 통제를 받는다는 내용을 신설했다. 군 내부에서 민간인이 군인을 통제하는 것을 두고 문제 제기가 이어져, 1980년 5월 ‘사령관은 특정경비구역과 관련된 작전활동을 할 때에는 대통령 경호실장과 협의한다’고 바뀌었다. 이는 수도방위사령부령 제5조2항 ‘사령관은 특정경비구역과 관련된 작전활동을 할 때에는 대통령경호처장과 협의하여야 한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일 경호처에 배속된 수도방위사령부 55경비단 병사들이 윤 대통령 체포영장 저지에 동원돼 논란이 됐는데, 이 문제의 뿌리가 차지철까지 닿는 것이다.



김용현은 경호처장 시절이던 2022년 11월 ‘경호처장이 군과 경찰을 지휘·감독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 뼈대인 대통령경호법 시행령 개정을 시도했다. 김용현은 경호처 직원 700여명뿐만 아니라 군 1000여명, 경찰 1300여명까지 모두 3000명가량의 군·경찰·경호처 인원을 지휘·감독하려고 했다.



야당은 “유신 시대 차지철을 꿈꾸는 거냐”고 반발했고, 경찰도 반대했다. 시행령 개정안은 ‘지휘·감독’ 문구가 ‘관계기관의 장과 협의’로 수정된 채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만약 당시 경호처장이 군과 경찰에 지휘·감독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시행령이 개정됐다면, 지난 3일 체포영장 저지 과정에 군과 경찰이 속절없이 동원됐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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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박정희 대통령 초도 순시를 앞두고 현장 점검에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앉을 자리에 미리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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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둘다 대통령 개인을 지키는 것을 국가를 지키는 것으로 착각했다. 차지철은 대통령의 신변을 경호하는 차원을 넘어 정권의 파수꾼을 자임했다. 차지철 경호실장 사무실에는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구속된 김용현은 지난 2일 공개된 옥중 서신에서 “대통령은 하루 24시간을 오직 국가와 국민, 민생만을 생각하시는 분”이라며 “애국동지 여러분,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대통령을 꼭 지켜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고 말했다.



사람에 충성하던 두 사람은 결국 대통령 경호에 실패했다. 차지철은 10·26 때 서울 궁정동 안가 저녁 술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숨졌다. 김용현은 윤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정지돼 서울 한남동 공관에 유폐되면서, 정치적 생명은 사망했다.



1987~2012년 약 25년간 경호처 공무원으로 일하며 대통령 6명을 지켰던 이성우 전 대통령경호처 안전본부장이 후배들에게 남긴 조언이다.



“중요한 것은 경호공무원은 대통령이라는 공인을 경호하는 것이지 대통령이 된 개인을 경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펴낸 구술채록 자료집 ‘청와대로 출근한 사람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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