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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이한호의 시공탐방] 조선족조차 10명 미만, 본토 중국인만 수백 명 모인 인력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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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한때 일용직 노동자의 집결지였던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삼거리 인력시장의 주 인구 구성이 조선족으로 재편된 지 수 년, 현재는 '본토 중국인'인 '한족'이 주로 이곳에 모인다. 지난달 20일 새벽 건설업 비수기임에도 수많은 한족 중국인(오른쪽 위)이 일거리를 줄 고용주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조선족과 한국인이 모이는 구역(왼쪽 아래)에는 10명도 채 안되는 인원만이 드문드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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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 인력시장에서 중국어를 쓰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승합차에 탑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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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남구로 인력시장에서 일을 받아 철근을 엮은 민태(가명)씨는 여전히 남구로역을 떠나지 못한다. 수십 년의 육체노동으로 닳은 허리를 두 번이나 수술했지만 더 이상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건설 현장을 나가는 것은 그만두고, 평생의 생업 터전이었던 인력시장 인근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소일거리를 한다. 어스름한 새벽이 아닌 훤한 대낮의 인력시장 거리에서 만난 그는 “이제는 애들 다(시집 장가) 보내놓고 아내와 둘이 남았는데 뭐… 먹고살 게 걱정이겠냐”면서도 일거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곳 인력시장은 대기업들 말고 개인들이 빌라 짓고 할 때 일할 사람 뽑아가는 곳인데 요즘 빌라들을 안 지어.”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새 건설 현장이 생기기는커녕 이미 착공한 곳들도 중단돼 이곳도 활기를 잃은 지 2~3년 됐다고 한다. 제아무리 건설업 비수기인 겨울이어도 일이 조금은 있기 마련이지만 민태씨를 만난 다음 날 찾은 새벽 인력시장에서 “구로동 빌라 현장 3명!"과와 같은 구인 호출은 들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 노동자를 구하는 공사장은 없었다.

조선족(중국 동포)이 주로 모이고 한국인이 간간이 섞여 있다는 남구로역 5번 출구 뒤편에는 소수의 인원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한족(본토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주로 모인다는 하나로마트 남구로역점 앞에는 일감을 찾는 인원이 빽빽이 서 있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결지라는 남구로역 2번 출구 뒤편은 5번 출구나 하나로마트 앞으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잠시 서 있을 뿐, 일을 찾는 이도 주는 이도 없었다.

민태씨는 “10년 전에도 외국인은 많았지만 일감이 급감한 2~3년 전을 기점으로 한국인은 거의 이곳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한때 조선족 노동자는 통역을 하는 팀장을 많이 맡았지만 이제는 조선족 노동자도 줄고 한국어를 아예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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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로 인력시장 남쪽에는 한때 철거민과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살던 '벌집촌'이 있다. 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벌집이 계단식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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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은 복잡한 계단과 더불어 한 층에도 빼곡히 들어서 있는 문이 특징이다. 한 건물에 여러 세대가 살기 위해 공간 분리를 했지만 화장실은 보통 공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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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의 한 벌집에 세대별로 가스계량기가 설치돼 있다.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의 한 벌집에 세대별로 가스계량기가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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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씨가 자갈을 가득 담은 질통(등에 메는 큰 바구니 형태의 도구)을 지고 처음 남구로 인력시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70년대. 당시 이곳은 외국인 대신 서울 도심에서 쫓겨난 철거민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첫 노동 계약이 이뤄진 시점이 언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맘때쯤부터 일하고 싶은 노동자들이 이곳에 본격적으로 모였다. 한때 인력시장을 지칭하던 용어인 ‘자생노동시장'이 전해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 누군가 주도해 조성한 곳이 아니라 일을 하고자 하는 이와 일을 주려는 이가 자연스레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위해 노동력을 거래하다 보니 ‘인력사무소’가 하나둘 들어서고 이 일대가 거대한 인력시장이 된 것이다.

인력시장 남쪽 가리봉동에는 이른바 ‘벌집촌’이 있다. 마찬가지로 70년대 전성기를 맞은 ‘구로공단’의 여공, 활발한 건축 시장에 힘입어 급성장한 인력시장의 건설 노동자들, 이곳의 ‘토박이’ 격인 철거민들이 건물 한 채에 20~30명씩 살았다. 다가구주택의 벽면 빼곡히 달려 있는 문과 복잡하게 얽힌 계단으로 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일과를 마치고 ‘오야지’라고 부르던 팀장에게 돌아가 그날 일당과 다음 날 일감을 받았다. 투전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 걸치다 벌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것이 당시 인력시장 노동자들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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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등 중국인 인구가 급격히 는 2000년대 이후 남구로 일대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병기하는 곳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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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의 주택 외벽에 중국어로 된 신년 달력이 부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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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입국하기 시작한 조선족이 일을 구하기 용이하고 집세가 저렴한 남구로 인력시장 인근에 정착하며 이 일대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숙련공 일감은 여전히 기존 한국인 노동자의 몫이었지만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노무는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조선족들에게 상당 부분 돌아갔다. 구로공단의 쇠락으로 여공들이 떠난 벌집은 이들의 차지가 됐다.

2004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이들도 '재외동포'로 인정하는 재외동포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3년 뒤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됐다. 합법적으로 장기 체류 및 근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국내 인력시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들이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남구로 인력시장 인근이 실질적으로 ‘차이나타운’화되고 재개발 논의까지 시작되며 내국인 이탈이 가속화됐다. 서울의 대표 인력시장인 남구로 인력시장은 가장 먼저 ‘동포’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렇게 20년가량 지난 현재 남구로 인력시장에서는 이제 조선족의 연변 사투리조차 듣기 힘들다. 한 세대가 지나며 한때 이곳을 주름잡던 조선족들도 내국인과 같이 힘든 건설업을 기피하고 타 지역으로 이주한 탓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자에 따르면 “최근 일감 감소로 한족마저 본국(중국)으로 꽤 돌아갔다”고 한다. 철거민, 공단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조선족마저 떠나고 지금은 한족이 주역이 된 구로 인력시장, 이곳을 다음에 채울 이들은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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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 인력시장에 셀 수 없이 많은 외국인 무리가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주로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비숙련공 외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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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 인력시장에 셀 수 없이 많은 외국인 무리가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주로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비숙련공 외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다.지난달 20일 서울 구로구 남구로 인력시장에 셀 수 없이 많은 외국인 무리가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주로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비숙련공 외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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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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