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서 달라진 현대차의 위상
美·日 완성차 업체는 물론 美빅테크까지
전방위 협업 요청…'K-모빌리티 스타' 급부상
편집자주[현대 레볼루션]은 현대자동차그룹이 글로벌 3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혁신 비결을 정리한 콘텐츠입니다. 예로부터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국가가 글로벌 경제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제조업의 꽃인 자동차 산업은 기술 발전과 수출, 고용의 측면에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과거 현대차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다면 이제는 산업을 이끄는 선두 주자(first mover)로 부상했습니다. 글로벌 취재 현장에서 느낀 현대차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주소를 그대로 전달해드립니다. 연재는 40회 이후 서적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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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2024년 11월 일본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만난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한일 모터스포츠 대결을 앞두고 한 얘기였지만 지금의 글로벌 자동차 시장 상황에 빗대어보면 묘하게 중의적인 표현으로 들렸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글로벌 판매량 1위를 지키고 있는 도요타의 현재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이견 없이 현대차그룹이다.
과거 도요타에게 현대차는 신경 쓰이는 ‘패스트 팔로워’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함께 손을 잡아야만 하는 전략적 동반자가 됐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자를 넘어 먼저 손을 내밀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K-모빌리티 스타’로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포털에서 자동차 뉴스를 살펴보자. 현대차와 관련한 믿을 수 없는 소식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 1위인 도요타와 모터스포츠 경기를 공동 개최하고,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인 GM과 포괄적 사업 협력 제휴를 맺었으며, 빅테크 구글의 자율주행 자회사 웨이모의 자율주행차 생산을 위탁받기도 했다.
불과 5년 전 이같은 뉴스들이 보도됐다면 가짜 뉴스라며 웃고 넘겼을 내용이다. 마치 BTS가 그래미어워즈 후보에 오르고 블랙핑크가 미국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의 무대를 ‘씹어먹었다’라는 소식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11월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서 열린 월드랠리챔피언십(WRC) 현장에서 만난 정의선 현대차그룹회장(사진 왼쪽)과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그룹 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현대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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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에게 도요타는 어떤 존재인가
지난 수십년간 도요타는 현대차의 롤모델이자 벤치마크 대상이었다. 도요타는 1980년대 미국에서 인정받기 위해 미국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JD파워의 초기품질조사(IQS)에 사활을 걸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도요타는 ‘연비 좋은 저가형 자동차’라는 인식이 강했다. 80년대 들어 J.D.파워를 비롯한 각종 신차 품질 평가에서 상위권에 랭크되면서 도요타 기술력, 내구성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굳어졌다. 기술을 인정받은 도요타는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해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를 1989년 론칭했다.
미국을 향한 현대차의 전략도 도요타와 거의 비슷했다. 현대차는 부품 공급망을 수직계열화하고 2000년대까지는 품질을 끌어올려 제품과 기술력을 인정받는 데 공을 들였다. 2016년에는 제네시스를 미국에 론칭하는 등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한 이미지 개선 작업에 주력했다.
지난 2014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사진 가운데)이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 현황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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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의 초기 품질경영을 이끈 건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다. 미국에서 ‘10년-10만 마일’이라는 파격적인 보증 정책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품질 경영에 대한 오너(정 명예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도 높은 품질개선을 주문한 정 명예회장은 ‘도요타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항상 도요타는 현대차가 추월해야 할 대상이었다.
2004년 JD파워 평가에서 처음으로 현대차 쏘나타가 도요타의 캠리를 제치고 중형차 부문 1위를 차지했는데 당시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은 "도요타 수준의 품질을 확보한다는 중장기 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며 "현대차 역사 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고 공식 석상에서 경쟁사를 대놓고 언급했을 정도다. 현대차의 품질경영에 대해서는 추후 연재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도요타에게 달라진 현대차의 위상
최근 일본 나고야에서 만난 도요타 임직원들도 달라진 현대차의 위상과 두 회사의 관계에 대해 신기하다는 듯 얘기했다. 지난해 10월 현대차와 도요타는 한국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모터스포츠 행사인 ‘현대 N x 도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을 공동 개최했다. 행사 다음 날 주요 신문의 1면은 한일 자동차 업계 수장이 얼싸안고 있는 모습으로 장식됐다. 한 달 뒤 두 회사의 수장은 일본에서 열린 월드랠리챔피언십(WRC) 경기를 위해 나고야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경기 직후 도요타는 일본주요 신문 10여개 매체에 "현대차의 드라이버 부문 우승을 축하하며,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치자"는 내용의 한글 광고를 실었다.
20여년 넘게 도요타에서 근무한 한 임원은 "도요타가 현대차와, 그것도 한국에서 공동 행사를 개최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감탄을 뱉어냈다. 행사에 참석한 외신 기자도 "과거 프랑스의 르노와 푸조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며 "도요타와 현대차가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동아시아로 가져오려는 움직임"이라고 평가했다.
WRC에서 활약 중인 현대차 'i20 N Rally 1 하이브리드'(사진 오른쪽)와 도요타의 'GR 야리스 랠리 1 하이브리드'. 현대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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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두 회사의 관계는 화합, 우정, 협력 같은 단어보다는 경쟁, 견제, 전쟁 같은 단어와 더 가까웠다. 2008년 무렵 도요타는 현대차에 인도공장 견학을 요청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인도는 내구성을 내세워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도요타가 유일하게 기를 펴지 못하는 신흥 시장이었다(중국은 제외). 현대차는 도요타보다 1년 먼저 인도에 진출해(1996년)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점유율을 높이고 있었다. 통상 완성차 업계에선 굉장한 비밀 프로젝트만 아니라면 표면적인 생산 라인 견학 정도는 경쟁사라도 쉽게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현대차는 도요타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직접적인 경쟁자인 도요타에게 이기고 있는 유일한 시장을 뺏길 수 없다는 경쟁의식은 물론 도요타에 대한 열등감까지 섞인 복잡한 감정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
현대차를 계속해서 의식한 건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항상 한 수 아래로 내다보고 있었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상대였음은 분명하다. 고바야시 히데오 와세다대학원 아시아태평양 연구학과 교수는 2011년 내놓은 <현대가 도요타를 이기는 날>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자동차 부문에서 현대와 도요타의 경쟁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테고 머지않아 그 둘은 나란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경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예견했다. 현재까지도 도요타는 미국과 인도에서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펴면서 현대차의 점유율 상승을 견제해오고 있으며 양사가 정면 대결을 펼친 수소전기차 개발에서도 언제나 현대차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메리 바라 GM 회장, 제네시스 하우스에 깜짝 등장
현대차의 브랜드 위상을 두고 격세지감을 느끼는 건 도요타뿐만이 아니다. 미국 빅3 자동차 업체 중 하나인 GM도 현대차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다. 지난해 9월 현대차와 GM이 포괄적 업무 협약을 맺은 사례도 현대차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공론이 GM 내부에서 모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 GM은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라는 사명에서 알 수 있듯이 GM은 미국에서 자동차의 대명사로 통한다. GM은 글로벌 자동차 판매 1위라는 왕관을 2008년 도요타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77년간 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군림했다. 하지만 거대한 GM 왕국도 2008년 파산보호 신청을 하면서 정부의 도움을 받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부침을 거듭하던 GM의 구원투수로 나선 인물이 바로 메리 바라 GM 회장이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2014년 글로벌 자동차 업계 최초 여성 CEO에 오른 바라 회장은 투명한 소통과 지속가능한 목표 설정, 조직에서 포용성을 발휘하며 무너져가는 GM을 재건했다. 이같은 히스토리 덕분에 그는 업계에선 ‘GM의 잔 다르크’로 불린다.
지난해 9월 제네시스 뉴욕 하우스에서 만난 메리 바라 GM 회장(사진 왼쪽)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양사 포괄적 협력을 위한 MOU를 맺고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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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바라 회장이 미국 뉴욕에 있는 제네시스 하우스를 직접 찾았다는 소식은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GM과 현대차그룹은 포괄적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GM의 결정에는 자존심만 내세우며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2008년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GM은 전기차 전환 계획을 가장 공격적으로 세웠던 글로벌 완성차 업체 중 하나다. 메인 시장이었던 중국에서 중국 로컬 브랜드의 침투율이 높아지면서 GM의 수익성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중국 역외에선 소비자들의 전기차 수용 속도가 생각보다 느렸다. 이미 주문해놓은 배터리와 각종 부품의 처리(=효율적인 배분)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 앞으로 신차 개발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나눠서 분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현대차가 GM 손을 잡은 이유
현대차 입장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공동 개발을 하고 각 브랜드 마크를 달고 생산하는 리뱃징으로 개발 원가를 줄일 수 있어서다. 또한 현대차는 전기차,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 분야에서 앞선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미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미국 시장을 두드리기 위해 미국 빅3 업체 중 하나와 손잡는 것은 현대차에게도 이득이다. 트럼프 2기 정부에 변화하는 친환경차 정책에 대해 미국 빅 3 중 하나인 GM이 대신해서 업계 목소리를 내주기를 기대하는 의중도 있다.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는 테슬라가 50% 내외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는 가운데 현대차와 GM이 2위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이다.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누적 기준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점유율이 9.5%, GM이 7.3%다.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현대차가 자국 브랜드인 GM과 겨룰 정도로 위상을 차지했다는 것 자체로 현대차는 고무적인 분위기다. 이번 제휴를 통해 현대차는 미국 현지에서 놀고 있는 GM 유휴공장을 활용한 생산 방안도 고려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생산될 예정인 현대차의 플래그십 전기 SUV 아이오닉 9. 현대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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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이번 협약이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다소 의문이 있다. 2020년 GM은 일본 완성차 업체 혼다와도 저가형 모델이나 로보택시 등 전기차 공동 개발을 선언했지만, 현재는 무산된 상태다. GM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도요타와 미국 캘리포니아에 세운 합작공장 NUMMI(New United Motor Manufacturing Incorporated)를 공동운영해왔으나, 2009년 파산 신청을 계기로 문을 닫게 된다. 2025년 현재 일본에서 한국으로 파트너를 바꾼 GM이 중국 전기차 업체의 공습을 이겨내고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과거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미일 동맹은 흔한 일이었지만 한미·한일 동맹은 흔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 완성차 업체는 물론 미국의 빅테크 기업인 구글까지 현대차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의 연재에서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K-모빌리티 스타’로 떠오른 이유를 낱낱이 분석해보기로 한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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