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집정부제·내각제, 양원제 개헌
국민의힘은 헌신, 민주당은 대화를
YS·DJ도 실패, 권한 분산·견제 필요"
편집자주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내란 사태'라는 역대 최악의 헌정 위기로 한국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인물의 문제인가, 제도의 문제인가, 두 문제가 만난 비극인가. 한국일보는 2025년 신년을 맞아 전문가들과 현행 대통령제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이를 담은 '대통령제, 새로고침' 시리즈를 3회에 걸쳐 보도한다.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 교수 연구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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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들었다. '한강의 기적'과 1987년 민주화를 이루고 글로벌 K문화를 선도하는 한국의 위상이 일거에 허물어지고 있다. 되풀이되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비극을 끊어내지 않으면 더 이상 나라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와 윤 대통령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이제는 대통령제와 작별할 때"라며 개헌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대통령만 절대 권력을 쥔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대선 때가 되면 모든 후보가 국민 화합을 외쳐도 당선된 뒤에는 달콤한 권력에 취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현 대통령제에서는 취임 후 '내가 하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라는 착각에 빠지고 상대 진영과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되살리려면 대통령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게 김 전 의장 주장이다.
그는 대통령 권력 분산 방안으로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절충한 제도)로의 권력 구조 개편과 국회 양원제 도입을 꼽았다. 대통령 권한은 크게 줄이는 대신 국무총리가 책임 정치를 구현하게 하자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정당과 국민이 양쪽으로 나뉘어 대통령 자리를 두고 싸움에만 골몰하는 상황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김 전 의장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에서 진행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부산에서 처음 당선된 뒤 내리 5선에 성공했고, 2008~2010년 제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까지 지낸 그는 지난해 8월부터 게이오대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尹, '더 벅 스탑스 히어' 새겼어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2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열린 KBS 신년 대담 녹화 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끝난다'(더 벅 스탑스 히어·The buck stops here)라고 적힌 명패를 소개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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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의장은 윤 대통령의 불법 계엄 선포는 현행 대통령제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리는 한국 대통령제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며 더 독선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윤 대통령은 아마도 '내가 대통령인데 왜 내 마음대로 못 하느냐'며 계엄령도 자신의 권한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며 "경륜이 부족한 정치인은 참모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는데 참모들과 거리가 멀어지니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전 의장은 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받은 '더 벅 스탑스 히어'(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끝난다) 명패를 가슴에 새겨야 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 명패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 탁상에 놓고 책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가를 대혼란에 빠뜨린 불법 계엄을 선택하고 말았다. 김 전 의장은 "지도자의 책임은 권한과 비례하는데 정치인들이 권한만 행사하려고 하니 후진적인 정치 문화가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국민의힘 향해 "여당이라 착각 말라"
한 시민이 지난달 28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헌정 유린·내란수괴 윤석열 구속 촉구 광주시민 8차 총궐기대회' 집회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 그림과 파면이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광주=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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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의장은 현 정국 상황과 관련해 여야 모두를 비판했다. 자신이 속한 국민의힘을 향해선 "국민의힘은 이제 여당이 아니니 착각하면 안 된다"고 질타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은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불법 계엄을 막지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국민의힘은)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문제"라며 "소수 정당이라는 생각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에는 원내 제1당답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전 의장은 "지금 정계의 중심은 민주당이고, 민주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정치가 달라진다"며 "거야(巨野)의 횡포를 부릴 때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할 때"라고 말했다.
"대선에만 매달리는 한국 정치가 문제"
2022년 3월 8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제20대 대선을 하루 앞두고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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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의장은 이번 사태를 통해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한국 정치의 문제점이 더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현재와 같은 대통령제 폐기를 주장하는 이유다.
그는 지금의 헌법 체계를 갖춘 1987년 이후 리더십과 지지 기반이 가장 탄탄했던 대통령으로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을 꼽았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아들들이 감옥에 가지 않았나. 두 사람마저 실패한 것이 한국의 대통령제"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지금의 대통령제를 바꾸지 않으면 다음 대통령은 역대 가장 불행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전 의장은 한국 대통령제를 '가장 강력한 정치 마약'이라고 표현했다. 막강한 권한에 비해 견제 기능이 너무 약하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정당들이 대통령 자리만 노리고, 정쟁에만 몰두하는 원인이라고도 설명했다. 한국 대통령은 예산과 사정기관 등을 모두 틀어쥐고 있지만 연방제를 채택한 미국처럼 대통령과 중앙정부를 견제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것이 김 전 의장 분석이다. 대통령 당선이 정당의 최우선 목표이니 대화보다 대립을 선택하고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김 전 의장은 "한국은 늘 대선 광풍에 매달려 죽기 살기로 싸운다"며 "정치가 아닌 진영 논리만 남으니 포용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이를 다른 곳으로 분산해야 한국 정치에도 대화의 장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尹 파면 시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 교수 연구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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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이 절호의 개헌 기회"라며 개헌 일정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이번 사태로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온 국민이 깨달은 만큼 개헌 여론을 형성할 적기라고 봤다. 우선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 탄핵안을 인용하면 이후 실시할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부치자고 제안했다. 또 만약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지 않더라도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책임은 져야 하는 만큼 윤 대통령의 임기는 지방선거가 실시되는 2026년 6월로 단축하고 여야 거국 중립 내각을 구성해 개헌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대통령제와 함께 단원제인 한국 국회도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선 결과에 따라 국회가 임기 내내 싸움만 하다 끝나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정작 이를 중재할 곳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 전 의장은 "한국 국회는 숙의하고 중재하는 과정이 없다 보니 상대 정당과 대화하면 배신자 신세가 된다"며 "양원제가 되면 입법 과정에서 숙려 기간이 생기고 논의를 더 거치게 돼 정당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류호 특파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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