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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5·18 진실’ 치열한 탐사보도…그 기자도 참사에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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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자가 가족 카톡방에 올린 마지막 글.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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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고인을 딱 한번 만났다. 5·18기념재단과 광주전남기자협회가 지난해 7월24일 연 ‘5·18 언론상’ 시상식장에 지인을 축하하러 갔을 때였다. 케이비에스(KBS) 광주방송총국 보도팀은 2년간 5·18 관련자 53명을 영상으로 채록해 보도했다. ㄱ(30) 기자는 수상 소감을 통해 “매년 5월18일만 되면 관련 보도를 내놓는 게 기자로서 면목이 없었다. 5·18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자는 취지의 기획이었다”고 말했다. 2019년 4월 보도국에 배치된 ㄱ 기자는 무명의 5·18 시민군 등 10여편의 구술을 채록하는 등 ‘5·18 진실 찾기’에 열정을 쏟았다.



“후배는 유독 현장 중계를 잘했습니다. 선배들은 그를 ‘엠인지(현장 연결 방송 뉴스)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대형 참사가 났는데도, 종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29일 제주항공 참사 탑승자 명단에서 고인의 명단을 발견한 동료들은 보도국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취재 수첩을 보며 고인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소외된 이웃들과 일제 강제동원 문제 등 근대사, 노동약자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라지는 붕어빵…노점허가제 논의를’(2024년 12월21일)이라는 기사가 마지막 보도였다. 참사가 발생한 뒤 ㄱ 기자의 가족에게 “5·18 진실 찾기에 진심이었던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동료를 통해 “가족들이 사연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질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2일 아침 무안공항 2층 유가족 임시 텐트에서 고인의 아버지(62·동양화가)를 만났다. 아버지는 주저하다가 딸의 ‘짧은 생애’를 들려줬다. ㄱ 기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상을 받을 정도로 글솜씨가 좋았던 딸”이었다. “서울 유수 대학 3곳에 합격했지만, 4년간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선택했어요. 화가인 저나 아내나 평생 비정규직이니까, 몰래 결정한 거지요.”



‘탐사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ㄱ 기자는 지난해 가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저널리즘혁신학과에 남편과 함께 진학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보도 툴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은 “고인은 5·18, 기후 이슈 등 시대의 이슈를 깊게 파고들었다. 주말에 시간을 쪼개 공부하던 기자였는데, 가슴이 매우 아프다”고 말했다.



부모에겐 “속 깊은 딸”이었다. 지난해 8월 엄마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조각가인 엄마에게 유럽 성당의 조각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이번에도 타이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ㄱ 기자는 엄마에게 네일아트를 선물했다. “엄마가 작품을 하며 흙을 자주 만지는 게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어머니(62)는 “딸이 ‘엄마도 네일아트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거의 딸과 비슷한 스타일로 했어요. 똑같이 이렇게…”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타이 공항에서 고인은 가족 카카오톡 대화방에 문자를 보냈다. “비행기 타느냐”고 묻자, “오늘 새벽에 타용”이라고 했다. ‘셀카’도 찍어 보냈다. 그런데도 그날 오전 도착 소식이 없는 ‘공주’에게 아버지는 “도착했는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답변이 없었다. 참사 소식을 듣고도 엄마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질 않았다. 하지만 “왼손 손톱의 네일아트”를 본 엄마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날 저녁 가족들은 ㄱ 기자가 사고 항공기에 남기고 간 불에 그을린 작은 손가방과 인형 등 유류품을 담은 상자를 건네받았다.



정대하 정인선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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