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05 (일)

노벨경제학상의 '맹점'으로 전락한 한국 : 대외신인도의 저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정연 기자]

2024년 12·3 내란 사태 후 윤석열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사람들이 나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탄핵당한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 최상목 권한대행 등은 하나같이 우리나라 대외신인도(international credibility)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국가의 대외신인도는 도대체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더스쿠프가 자세히 알아봤다.

더스쿠프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지난해 12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사진 |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어느 나라를 믿고, 어느 나라를 조심해야 할까. 한국은 세계에서 어느 정도로 믿을 만한 나라일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대체로 숫자를 제시한다.

우선 경제력으로 보면 한국의 위치는 전세계 상위 5~8%쯤 된다. 우리나라의 2023년 국내총생산(GDP)은 세계은행 집계 기준으로 1조7127억 달러로 14위를 기록했다. 유엔이 인정하는 국가는 195개국이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집계한 국가 수는 237개다.

■ 한국의 가치=군사력으로 보면 한국의 가치는 좀 더 올라간다. 2005년 이후 세계 각국 군사력 지수를 발표하는 글로벌 파이어파워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5위 수준이다. 2014년 7위에서 10년 만에 두 계단 상승했다.

신용등급으로 보면 한국의 순위는 17~20위권이다.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는 호주‧독일 등 11개국에 최고 신용등급인 AAA를 부여했다. 국가부채 문제로 정치권이 대립 중인 미국은 대만‧뉴질랜드 등과 함께 2011년부터 AA+ 등급이고, 한국은 그다음인 AA 등급에 머물러 있다. 무디스‧피치도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국가의 국제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대외신인도를 이렇게 숫자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서 글로벌전략을 담당하는 제라드 코헨은 2023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세계적인 신뢰도 격차'라는 기사에서 "국가의 국제신인도는 경제력과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 문화적인 매력을 뜻하는 소프트파워, 그리고 역사나 역사상 맥락과 같은 무형의 특성으로 결정된다"며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 강대국이지만, 국제신인도는 1990년대 소프트파워가 전성기였을 때 정점에 도달한 후 하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코헨의 정의를 따르면 한국은 2024년 12월 2일까지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컨설팅회사 브랜드 파이낸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소프트파워 지수에서 한국은 2024년 15위를 기록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브랜드 파이낸스의 지수를 재가공해 발표한 2021년 세계 소프트파워 순위(발표는 2024년)에선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

IMF는 2024년 10월 발표한 '소프트파워 측정: 새로운 글로벌 지수'라는 보고서에서 "한국과 일본의 소프트파워 수준이 극도로 높다는 것은 놀라운 결과"라며 "갈수록 각국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 세상에서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고 강조했다.

더스쿠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시 민주주의=하지만 12·3 사태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통계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 중심엔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대 교수)의 주장과 역사학자들의 반박이 서 있다. 무슨 말일까. 하나씩 설명해보자.

경제학자 3명의 연구 골자는 민주주의처럼 포용적인 제도를 가진 국가는 경제발전을 통해서 성공하고, 독재처럼 착취적 제도로 돌아가는 국가는 정치·경제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한국과 북한이었다.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2013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카네기 중동 센터 세미나에서 "북한의 중앙계획경제는 시민들의 기회와 경제적 이익을 제한했지만, 한국의 포용적 정치 및 경제 제도는 성장을 촉진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계는 이들 3인의 연구가 대서양 강대국들이 힘으로 굴복시킨 사람들의 노동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4년 10월 노벨경제학상을 다룬 기사에서 "이번 수상자들의 영향력을 의심하는 경제학자들은 거의 없지만, 이들이 연구에 사용한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다"며 한국 사례를 둘러싼 문제 제기를 소개했다.

"역사학자들은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은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도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은 농민을 몰아낸 결과이며, 미국의 성공은 백인 남성의 개인적 권리와 민주주의를 노예 제도와 맞바꾼 결과라는 것이다."

이같은 논쟁에도 이들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를 나누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조셉 나이가 1990년대에 대외신인도에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란 개념을 도입한 후 30년 만이다. 이제 한 국가의 국제적 가치는 민주주의, 사유재산제, 시장경제 등 포용적인 제도를 도입했는지 여부로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 군사 독재의 그림자=이런 점에서 한국의 상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은 '포용적 민주주의'를 발판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경제발전을 이어간 기간이 더 길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1963~1979년 박정희 정권 16년, 1980~1988년 전두환 정권 8년, 합쳐서 24년간 이어졌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한강의 기적'은 진행됐다.[※ 참고: 사실상 문민정부가 열리기 전인 노태우 정권까지 합치면 군사독재 기간은 30년에 육박한다.] 이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의 경제지표는 이전부터 맹점을 갖고 있었다. 가장 큰 건 경제 통계와 국민 감정의 괴리가 컸다는 거다.

한국의 행복지수 순위는 군사력 5위, GDP 규모 14위, 소프트파워 1위라는 통계와는 동떨어져 있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행복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2024년에도 54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국내 민간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한국'의 경제적 가치도 여러 대외신인도 순위의 평균치에 한참 모자란다.

더스쿠프

1964년 12월 6일부터 12월 8일 독일(당시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항에 영접 나온 서독 뤼브케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사진 |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매월 발표하는 기업·소비자의 경제심리지수는 2024년 6월 94.7포인트에서 7월 95.9로 상승했지만, 10월 92.5, 11월 92.7로 점차 하락했고, 12·3 사태로 폭락했다. 12월 경제심리지수는 전월보다 9.6포인트 하락한 83.1이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대외신인도에 신경 쓴다고 선언하는 동안 국민들의 시장 신뢰는 바닥을 기었다.

이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주장대로 우리나라가 '포용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장해온 게 아니라는 걸 방증한다. 윤 대통령이 발령한 '12‧3 비상계엄'은 국민 감정 밑단에서 잠재해 있던 '군사독재와 권위주의를 향한 공포와 혐오'를 건드렸고, 그런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 대외신인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켜볼 일이다. 어떤 경로든 윤 대통령이 선택한 '12‧3 비상계엄'은 한국경제를 뒤흔드는 '최대 변수'가 됐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저작권자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