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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현재
곳 : 단독주택, 침실
등장인물
병철(58세, 남)
동수(95세, 남)
은희(57세, 여)
민식(32세, 남)
태연(29세, 여)
곳 : 단독주택, 침실
등장인물
병철(58세, 남)
동수(95세, 남)
은희(57세, 여)
민식(32세, 남)
태연(29세, 여)
1장
무대는 침실이다. 옷장과 수납장이 있고 선반에 동수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액자가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누런 자국이 남아 있는 벽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병철과 은희가 잠들어 있다.
병철의 코 고는 소리가 이어지면, 동수가 지팡이를 짚고 등장한다.
동수: 끌끌끌…. 자식, 잘도 자는구만. 인자 좀 먹고살 만허냐? 이 썩을 자슥아! 아부지 왔다. 인나라! 느그 아부지 왔다!
동수, 병철을 내려다보며 발로 걷어찬다.
병철: (눈을 비비며) 야밤에 누구여…. 워메, 아부지!
동수: 이 자슥, 인자 배때지가 뜨뜻허니 먹고살 만한갑네.
병철: 아부지! 무슨 일로 또 이까지 오셨수!
동수: 인마, 아버지가 자식놈 생일도 못 챙기냐?
병철: 생일?
동수: 그려! 생일! 워떠냐? 이 애비 덕에 좀 먹고살 만허냐?
병철: 아유, 말을 혀야 뭣할라요. 접때 아부지가 짚어 준 종목들이 상한가를 칠 줄을 누가 알았겄어요? 아부지 덕에 우리도 인자 팔자 폈으요! 강진 당숙네에 저당 잡힌 주택담보 싹 다 갚구, 십 년 묵은 신용대출도 깨끔허게 정리해부렀당께요. 보소, 이 집도 우덜 것이라요. 울 집안도 인자 남부럽지 않다고요.
동수: 자슥, 얼굴 폈네. 살림도 이만허믄 좀 나아진 것 같고. 애들은 잘 있냐?
병철: 애들이요? 그 개팔 놈의 호로자슥들은 말도 마셔요. 연락 끊긴 지 오래구만.
동수: 다 죽어 가는 집안 살려 놨더니 도루 콩가루네.
병철, 베갯머리에서 신문지와 볼펜을 꺼내 든다.
병철: 아부지, 고건 고렇고 요참에는 어디요? 어따 돈을 박어야 쓰겄소?
동수, 병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딴청을 피운다.
병철: 아따, 아부지 그라지 말고 요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알려주쇼! 아니믄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주셔요!
동수: 패가 안 좋아.
병철: 고거이 뭔 말이여?
동수: 다 잃을 패다, 이거다.
병철: 좀 알아듣게 말혀 보소!
동수: 이 자식아, 잘 들어라. 너 애비 덕에 딴 돈 그거 있지?
병철: 암요. 인자 그 돈으로 대대손손 먹고 살아야제!
동수: 그 돈 하룻밤에 다 잃을 거다.
병철: 고거시 뭔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여?
동수: 오늘 하루다. 시간이 읎어.
병철: 와요? 뭣 땀시 나가 돈을 다 잃는다는 거시여?
동수: 한 방에 땄으면 한 방에 또 잃는 거지.
동수,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한다.
병철: 아부지, 가지 마요. 인자 좀 먹고살만헌디 다 잃는다뇨.
동수: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 알지? 요즘은 ‘운구기일’(運九技一)이란다.
병철: 운구기일?
동수: 다 운이다 이 말이여. 아등바등 살아 봐야 우에 쓸꼬, 팔자가 좌우하는 벱인 것을….
동수, 크게 웃으며 퇴장한다.
병철: 아부지! 아부지!
병철, 동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면, 자고 있던 은희가 깨어난다.
은희: 여보, 여보?
병철: (넋이 나간 채로) 아부지! 아부지….
은희: 이 양반이 자다 말고 왜 땀을 비질비질 흘리구 소리를 꽥꽥 질러대?
병철: 어? 뭐시여? 당신이여?
은희, 선반에서 알약과 물그릇을 가져와 병철에게 먹인다.
은희: 또 자다가 뭐라도 본 거야? 왜 그렇게 얼굴이 새파래졌어?
병철: (약을 삼키며) 아부지 왔다 갔어.
은희: 또? 죽은 아버님이?
병철: 그, 글씨 말여….
은희: (반색하며) 이번에는 또 뭐래?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 줍디까?
병철: 개꿈이여.
은희: 개꿈?
병철: 그려! 개꿈!
은희: 뭐라고 하셨는데?
병철: 아니 글씨, 요참엔 돈을 다 잃을 거라네….
은희: 그거 개꿈이네.
병철: 접때는 돼지꿈이더니 요번엔 개꿈이여.
은희: 그냥 흘려들어.
병철: 아부지 덕에 돈방석 앉은 거 잊었어? 무시혔다간 집안 말아묵어!
은희: 당신 꿈속에서 아버님 나타났다는 게 몇 번째지?
병철: 아이, 요참에도 확실하다니께.
은희: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저번에 그것도 그냥 운이 좋아서 대박 났던 거 아냐? 솔직히 요즘 같은 때에 이게 뭔 귀신이 씻나락 까먹을 소리야. 아무래도 집터가 이상한가 봐. 언제 한번 굿이라도 해야 하려나.
병철: 이 사람이 아직도 못 믿네? 꿈 속에서 아부지가 다 알려 줬다니께. 금영에 칠천! 현산에 팔천! 그 육실헐 잡주들이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한 맹크롬 들쓱거릴지 누가 예측혔겄어? 그걸 우덜 같은 선량한 서민들이 워쩐다고 예측혀? 다 아부지 덕이제….
은희: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는 거 자체가 망조야!
병철, 수납장에서 신용카드, 통장, 인감도장, 집문서 따위를 꺼내어 바닥에 늘어 놓는다.
병철: 어디 보자. 농협에 칠천, 새마을에 육천, 수협에 삼천오백….
은희: 뭐하는 거야?
병철: 일단 우덜 계좌에 있는 돈은 싹 다 인출해 와야 쓰겄구만.
은희: 그 돈 들고 워따 쓰게?
병철: 여그 보이는 데에 딱 놓구 지켜야제.
은희: 그다음은?
병철: 집안에 돈 될 만한 물건도 싹 다 창고로 좀 옮겨야 쓰겄어.
은희: 그렇게 하면 잃을 돈이 그대로 있대?
병철: 아부지가, 분명히 아부지가 말혔어….
은희: 이 양반이 진짜, 돈이 그렇게 좋아? 망할 놈의 주식질에 맛들리더니 헛것이 보이는 거야!
병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친다.
병철: 나는 은행엘 좀 갔다 올 것인께. 당신은 창고에 물건 좀 옮겨 둬.
은희: 이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병철: 시간 읎어! 싸게 움직여!
은희: 민식이 아부지, 난 말이야. 이런 돈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우리 목포 월세집서 시작했을 때처럼…. (곰곰이 떠올리다가) 아, 그땐 좀 아닌가?
병철: 가난뱅이였던 때가 좋아? 씨빠지게 고생혔던 때가? 밤낮 공장서 일당 받아감서 삭신이 쑤시네 어쩌네, 앓는 소리 달고 살믄서 은행에 돈 갖다 바쳤던 때가?
은희: 주식하고 나서부터는 당신 맨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눈알 퀭해 가지고는 헛것이 나 보고, 이딴 약이나 달고 살고 말이야. 사람이 뒷바라지를 시켜도 정도껏 해야지.
병철: 요것이 다 내 땜시다?
은희: 당신은 뉴스도 안 봐? 밤낮 돈, 그놈의 돈 때문에 가족끼리 칼로 배때지를 쑤셔대고 이게 정상이냐고?
병철: 그런 썩어 빠진 정신으로는 요즘 같은 시상에서 못 살아남어. 글고 우덜 자석들 생각은 안 혀? 울 자석들은 번듯허게 살게 혀야 않어? 이거, 이거, 이 집두 워뜨케 산 건디?
은희: 자식들 생각한다는 인간이 애들이랑 연락도 끊고 살어?
병철: 당신은 신경 꺼! 나가 다 알어서 헐것잉께! (넋이 나간 채로) 아, 아부지, 아부지 어따가, 어따 돈을 넣어야 이 우환을 피할랍니까….
병철, 통장과 신용카드, 인감도장, 집문서를 집어 들고 퇴장한다.
은희: 얻다 대고 큰 소리야? 저 망할 놈의 인간, 된통 당해 봐야 속이 시원하지.
은희, 불길하다는 듯이 동수의 영정사진을 뒤집어 놓는다.
암전.
2장
무대는 이사를 앞둔 집처럼 텅 비어 있다. 동수의 영정사진이 옆으로 누워 있고 가구가 있던 자리는 짙은 자국만 남아 있다. 구석에 놓여 있는 빗자루.
조명이 밝아지면, 병철과 은희가 여행 가방을 낑낑대며 끌고 등장한다.
병철: 어구, 무거워라!
은희: 어디 금고에라도 넣어 놔야 하는 거 아냐?
병철: 집에 금고가 어딨어?
은희: 그럼 이 많은 돈을 어떡하려고?
병철: 저짝 다용도실에 박스 몇 개 없는가?
은희: 감자 박스가 있긴 할 텐데.
은희, 퇴장한다.
병철, 여행 가방을 연다. 오만 원짜리 지폐 다발이 쏟아져 나온다.
병철: 이 한병철 쉽게 안 죽는다. 이거시 워뜨케 딴 돈인디. 아부지, 보고 계시죠?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니어요.
은희, 감자 박스를 들고 등장한다.
은희: 이거면 돼?
병철: 이리 가져와 봐. 다 들어갈란가 모르겄네.
병철, 감자 박스에 돈을 차곡차곡 담는다.
은희: 그러니까 이게….
병철: 우덜 계좌에 짱박아 둔 것은 다 쓸어온 거시여.
은희: 무슨 계좌?
병철: 아따, 그 뭐시냐, 보이스피싱인가 머시긴가 땀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여. 출금 한도가 걸려분다고 은행 청년이 하두 의심을 혀 싸는 바람에….
은희: 그나마 찾아온 게 이 정도라는 거야?
병철: 긍께 당신 것이랑, 내 것이랑 끄낼 수 있는 현찰이란 현찰은 죄 뽑아온 것이여. 저짝 읍내부터 시내꺼졍 은행만 여섯 군데를 돌아다녔다니께!
은희: 개꿈 하나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집 치우랴 돈 숨기랴 이게 뭔 짓이야?
병철, 박스를 단단히 포장하며 집문서, 통장, 인감도장까지 넣는다.
병철: 이걸 인자 여그다 넣고 자알 지키기만 허믄 돼.
은희: 지켜? 어떻게?
병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보다가 빗자루를 집어 든다.
이내 사주경계를 하며 초병처럼 듬직하게 서 있는다.
은희: (한참을 보다가) 그러고 언제까지 있을 건데?
병철: 아부지가 분명 하루라고 혔어….
은희: 하루?
병철: 오늘 하루만 이 돈이 고대로 여기 있음 되는 거시여.
은희: 당신 진짜 이번에 아무 일도 없으면 주식 그만하는 거야. 사람이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병철: 뭐? 승실?
은희: 생전 자식들한테는 제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살라고 혁대 풀고 고래고래 야단을 쳤으면서, 애비란 작자가 저러고 자빠졌으니.
병철: 알어! 잔말 말구 싸게싸게 돈이나 지켜. 암만혀도 불길하단 말이여.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잔뜩 경계하며 밖을 노려보는 병철과 은희.
침묵이 흐르면, 두 사람을 재촉하듯 초인종이 연달아 울린다.
은희: 누가 왔나 봐.
병철: 아침 댓바람부터 올 사람이 누가 있어?
은희: 나가 볼까?
병철: 잠깐! 나가지 말어!
은희가 무시하고 나가자, 병철은 감자 박스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살핀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민식과 태연이 케이크 박스를 들고 등장한다.
민식, 태연: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태연, 삑삑이를 분다.
은희, 뒤따라 들어온다.
은희: 웬일이야? 연락일랑 하고 오지! 태연이도 같이 왔네!
은희, 태연을 꼭 끌어안는다.
민식: 어머니, 잘 지내셨죠?
태연: 아따, 명절도 아닌디 차가 허벌나게 막혀부렀소.
은희: 둘이 어떻게 이렇게 같이 왔어?
민식: 터미널에서 만나서 같이 왔어요.
은희: 여보, 우리 애들 왔어!
병철: (떨떠름한 표정으로) 느그들,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더니 웬일이냐?
민식: 꼭 무슨 일 있어야 오나요? 오늘 아버지 생신 아녀요. 축하드리러 왔죠.
병철: 우리 첫째, 복지관서 사회복지산가 머시긴가 허느라 바쁘담서.
민식: 내내 복지원에 있다가 새벽에 내려 왔어요. 여기 눈 밑에 다크써클 봐요.
태연: 아부지, 오랜만이요? 근디 내는 별로 안 반가운 갑소?
병철: (싸늘하게) 니는 서울서 사업허느라 바쁘담서.
은희: 아유, 또 왜 그래? 간만에 우리 가족 이렇게 다 모였는데!
민식, 케이크 박스를 흔들어 보인다.
민식: 아버지, 제가 케이크 사 왔어요. 고구마 케이크.
태연: 그라요. 일단 께이크에 불부터 붙입시다.
민식, 케이크 박스에서 성냥을 꺼내려고 하면,
태연,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켠다. 어색한 침묵.
은희: 참, 부엌에 소고기미역국 있는데 그것도 좀 가져와야겠다. 간만에 이렇게 다 같이 모이니까 얼마나 좋니?
은희, 퇴장한다.
민식, 케이크를 꺼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민식: 아니, 근데 밖에 있던 식탁은 어디 갔어요?
태연: 그라고 보니께 가구들이 죄 사라져 부렀네.
민식: 어? 할아버지 사진은 왜 이러고 있어요?
태연: 여행 가방은 또 뭐시여?
병철: 뭐, 뭐가?
민식: 우리 가족 사진도 없어졌네!
태연: 아부지, 집안 꼴이 와 이랍니까? 워데 이사 갑니까?
병철: 벽지 도배를 새로 혀서 그란다. 창고에 다 있응께 신경 꺼라.
태연: 벽지는 누리끼리한 거시 그대론디….
민식: (케이크 박스를 흔들며) 이걸 올려둘 곳이 필요한데요.
민식, 태연 주변을 살핀다.
병철: 느그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태연, 감자 박스를 발견한다.
태연: 저짝에 박스 하나 있구만.
민식: 잠깐 그거라도 여기 가운데에 두죠.
태연, 말릴 틈도 없이 감자 박스를 들어 중앙으로 옮긴다.
태연: 아따, 묵직한 거시 상으로 딱이네잉.
병철: 안돼! 누구 맘대로 그러는 거여!
태연: 거참, 여그 뭐 금덩이라도 들었소?
병철: 느자구 없는 것들이 댓바람부터 들이닥쳐 가지고는, 여그 안 갖다 놓냐?
병철, 빗자루를 마구 휘두른다.
태연: (기침을 한다) 워메, 아부지! 먼지 날린당께요!
은희,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들고 등장한다.
은희: 아니, 이 양반이! 애들아 글쎄 니들 아버지가 말이다.
병철: 에헤이, 진짜!
민식: 경계 좀 풀어요. 오늘 생신이잖아요. 아무도 아버지 안 해쳐요. 저희는 진심으로 축하드리러 온 거예요.
태연이 감자 박스를 툭툭 털면, 민식은 그 위에 케이크를 올려 둔다.
병철: 이건 내 거야, 내 거라고. 왜 내 것을 느그들이 맘대로 하려고 혀?
민식: 잠깐 쓰고 저기다 그대로 돌려 둘게요.
병철: 내 거라는데 자꾸, 어?
태연: ···참말로 째째허시네. 아부지 성깔은 하여간 징해부러.
민식: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또 안 좋다고 하니까.
민식, 태연 웃는다.
병철: 우째 느그들은 만날 멋대로냐? 집 나가는 것도 멋대로, 연락도 멋대로, 불쑥 찾아오는 것도 멋대로. 왜 매사에 느그들 맘대로인 거냐고?
민식: 우리 아버지, 서운했구나?
병철: 그려! 서운혔다! 인자 솔직허게 말혀 봐라. 무신 볼일이 있어서 온 거냐?
민식: 가족이란 게 무슨 볼일이 있어야 만납니까. 늦게 와서 미안해요.
병철: 이 늙은 애비가 눈치도 없는 줄 알어? 이것들 시커먼 속내가 있어서 온 거시여. 고거이 아니믄 저렇게 방실거릴 것들이 아니여.
은희: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섭하게 해. 얼른 케이크에 불이나 붙이자.
은희, 감자 박스 위에 냄비를 올려 둔다.
민식이 케이크에 초를 꽂으면, 태연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민식: 이야, 초에 불이 붙으니까 연말 느낌이 나고 좋은데요?
민식, 병철의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운다.
병철: 어허이! 뭐시여?
민식: 아버지,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려요. 만수무강하셔야죠. 간만에 노래라도 같이 부를까요?
병철: 노래는 무슨!
민식: 자자, 축하 노래 다 같이 부르는 거예요.
은희, 벽면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민식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자, 은희와 태연도 덩달아 부른다.
은희, 민식, 태연: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병철, 빗자루를 쥔 채로 머쓱하게 있다.
은희: 빨리 불어! 초 다 녹는다!
병철, 마지못해 불을 끈다. 울려 퍼지는 박수와 웃음소리.
태연이 폭죽을 터트리면, 은희가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 조명이 다시 밝아진다.
병철: 이란다고 눈이나 끔뻑할 거 같으냐? 시상 천지에 느그들 만치….
은희, 케이크 칼로 케이크를 크게 썰어 병철의 입에 넣어 버린다.
은희: 소원 빌었어?
병철: (우물대며) 소원은 무슨!
민식: 자, 다들 건강하시라고 제가 대신 소원 빌었다 칠게요.
민식, 바닥에 흩어진 폭죽 잔해를 치우면,
은희, 병철의 입을 소매로 거칠게 닦는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는 민식.
태연, 주위를 서성이다 목을 가다듬으며 병철에게 가까이 간다.
태연: 아부지, 인자 생일 축하도 혔겄다. 쪼까 드릴 말씀이 있는디요…. (사이) 긍께, 시방 지가 요참에 투자처에서 중국 수출 계약 건을 하나 잡아부렀는디, 계약금을 저당 잡을 것이 쪼까 부족허거든요? 큰 거 두 장으로 급전만 땡기믄 그다음 수익은 서너 배로 불릴 수가 있는디….
병철: (케이크를 삼키다 말고) 너, 너 지금 그따구 소리가 목구녕서 나오냐?
태연: 아따, 아부지!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보시랑께요.
민식: 야, 아까랑 얘기가 다르잖아? 돈 얘기 안 한다면서?
태연: 우째 이래? 오빠도 돈 얘기할라고 온 거 아녀? 요새 복지원 힘들어서 후원 필요하다 안 혔어? 계장인가 뭔 쌈장인가 실적 타령 허믄서 들들 볶는담서?
민식: 인마, 사람이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지. 아버지 앞에 두고 다짜고짜 그게 맞아? 너도 허구헌 날 돈 빌린 사람들 쫓아다녀 봐서 알 거 아니냐. 이런 일일수록, 절차에 맞춰서 진행하는 게 업계의 도리 아니겠냐.
병철, 이마를 짚는다.
병철: …이 새끼들이 보아하니 생일 핑계 대고 또 돈 빌리러 왔구나.
태연: 아부지! 내는 참말로 힘들어요. 인자 곧 나이가 서른인디 신림동 단칸방서 월세살이 허구, 대출금 갚느라 바쁘당께요. 참 웃기지 않어요? 냄들한테 돈 빌려주는 내 같은 금융업자도 빚을 갚느라 또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니께? 무신 놈의 시상이 죄다 대출이고 할부고 빚으로 돌아가요. 요즘도 다달이 나가는 이자 갚느라, 요 주둥이가 바짝바짝 마른당께요. (사이) 아부지, 인자 손주는 봐야 쓰지 않겄소?
민식: 금융업은 개뿔, 사채로 사람들 등쳐 먹고 다니는 것이….
태연: 뭐시여?
민식: 중국 수출이 뭐? 이제는 약장사도 하냐?
태연: 먼 약을 팔어? 요참엔 화장품이여. 화장품.
은희: 니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이를 똥구녕으로 먹는 건지 만났다 하면 쌈박질이냐?
병철: 오늘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다 니들 때문이구나. 돈 잃는다는 얘기가 다 느그들 때문이여. 조상님덜, 보고 있소? 나가 전생에 먼 죄를 지었다고 자슥들이 이랍니까.
태연: 예? 먼 돈을 잃어요?
민식: 아버지, 죄송해요. 집 앞에서 싸우지 말자고 그랬는데….
은희: 돈, 돈, 그놈의 돈 얘기 지긋지긋하다. 먼 놈의 대화가 도로 돈 얘기냐? 이러니 집안이 콩가루네 뭐네, 동네 마실에서 할매들이 손가락질을 해 대지. 집안 꼴이 아주 아사리판이야.
태연: 간만에 모였응께 다 같이 살 궁리를 찾자 이거죠. 가족 아닙니까.
병철: 다 같이 살어? 너 우리랑 다 같이 살자고 접때 돈 안 빌려준다고 연락 끊었냐?
태연: 나가 시방 언제 연락 끊었다 그라요? 핸드폰 신형으로 바꿔서 그렸다 안 혔어?
병철: 느그들한테 줄 돈 10원두 없다. 돌아가라. 보기도 싫다!
태연: 에이, 돈이 없긴…. 집에 가구며 돈 될 만한 건 싸그리 치워 놓구.
병철: 뭐시여?
민식: 아버지, 근데 정말 저희들 오는 거 알고 물건 치우신 거예요?
태연, 집안을 둘러본다.
병철: 뭐, 뭐가? 느그들이 뭔 상관이여? 도둑놈들도 아니구? 여그는 느그 엄니랑 내랑 씨빠지게 주택담보대출 갚아서 산 내 집이란 말이다. 내 집서 나가 맘대로 집도 못 치우냐? 이 손을 봐라, 딱딱허게 이 마디마디가 죄다 늘러붙은 이 손을. 나가 이 손으로 평생 쇳질을 해다가 은행에 차곡차곡 적금 부어서 산, 내 것이다 말이다.
민식: 네? 집을 사셨다고요?
태연: 당숙 어른네 집이 아니고? 워메, 먼 수로?
병철: 느그들이 알 거 없다.
병철이 감자 박스를 치우려고 하자, 태연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태연: 아부지! 참말로 부탁 좀 헙시다. 요참엔 분명 감이 좋아요. 나가 시방 어젯밤에 먼 꿈을 꿨는 줄 알어요? 이 집채만 한 황금돼지가 가랑이로 들어왔당께요! 요 몇 년 새 그런 돼지꿈은 처음이었제. 지금도 눈앞서 본 것 맹크롬 아주 선명혀. 휘황찬란하게 순금으로 맹근 돼지드라니까? 그라서 오는 길에 편의점서 스피또도 하나 샀어요. 부정탄다고 혀서 아무한테도 말 안혔는디…. 근디 요참엔 참말 이어요.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믿어 보시랑께요. 열 배, 아니? 스무 배로 돌려줄 수가 있당께요. 그 돈이믄 대대손손 먹고살고도 남아불제. 우리 가족도 인자 남부럽지 않게 살 수가 있다니께.
병철: 뭐? 꿈? 정신머리가 있는 눔이냐 없는 눔이냐? 그리고 뭐? 스피또? 젊은 놈이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 궁리를 혀야지, 미친 것!
태연: 내 믿고 한번만, 지발 목돈 좀 마련 해 줘 봐요. 큰 거 두 장은 바라지도 않어. 딱 한 장만 있어도 떡을 치고도 남제. 암, 그라제잉.
민식: 저어, 아버지? 말이 나온 김에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병철,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본다.
병철: 니들은 천성부터 버러지여. 애비가 느그들 땀시 여태 잃은 돈이 얼맨 줄 알어? 이 집안 말아먹을 놈들아! 서울서 번듯허게 자리나 잡으라고 씨빠지게 쇳밥 먹어감서 아등바등 키워 놨드만. (가슴을 치며) 워메, 복창 터져분다!
태연: 나가 뭐 첨부터 이렇게 돈, 돈 거렸는 줄 알어요? 다 시상이 이렇게 맹글었다 안 합니까. 아니, 막말로 냄들은 집에서 다 척척 해 준다고. 갸들하고 나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니께?
민식: 아버지,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얘기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저희들 계획은 말이죠….
병철: 느그들이 그러니 문제다! 두 손이 멀쩡한 것들이 쇳질을 하든, 길바닥서 발품을 팔든 일을 혀서 번듯하게 자수성가를 혀야 쓰지 요즘 것들은 돈만 생겼다허믄 워따가 꼬라박을 생각부터 하니. 고거시 전부 한탕주의다, 이 말이다!
태연: 뭐시여? 뭔 주의? 워메, 기냥 맥아리가 확 나가부네잉. 나가 이 말은 안 할라고 혔는디, 막말로 아부지 때랑 지금이랑 같어요?
병철: 다를 건 또 머시여?
태연: 한탕주의로 따지믄 소싯적 아부지도 한따까리 허셨음서, 남 말하듯 허는 거시 참말로….
민식, 태연 웃는다.
병철: 너 이 자슥, 주둥이 안 다물어?
태연: 못 다물어요! 요것이 다 아부지한테 배운 거 아녀요. 우리 집이 그동안 와 돈이 없었는지 엄니는 알어? 공장 장막 치믄 읍내 잡부들이랑 비닐하우스서 삼삼오오 모여가 아부지가 섯다 치믄서 돈을 월매나 땡겼는디? 일당 받으믄 밤낮 경마장에서 눈깔 빠지게 뻬팅이나 했음서, 뭐시여? 내보고 한탕주의?
병철: 그 주둥아리로 한마디만 더 지껄여 봐라잉!
태연: 나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일찍부터 집안 건사하랍시고 대학도 못 가게 허고, 상고로 밀어 넣은 것이 아부지 아니여? 나가 상고 졸업하고, 열아홉에 뭣 땀시 은행에 기 들어가 행원으로 씨빠지게 일을 혔는디? (웃는다) 나가 그 망할 놈의 캐피탈이란 것을 열아홉에 은행서 다 깨우쳐 부렀지라. 그라니 지금 이라고 냄들한테 돈 빌려주고, 이자 장사하고 있는 거 아녀요.
병철: 뭐시여? 캐피탈? 이 가시나, (태연의 머리를 민다) 니가 그리 원대한 꿈이 있어 은행 박차고 나와서 냄들 삥이나 뜯구 사냐!
태연: 지금 나 쳤소?
태연, 감자 박스를 엎고 일어난다. 박살나는 케이크.
병철: 이 육실헐 것이….
병철, 덩달아 일어나자, 태연은 감자 박스를 발로 걷어찬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쏟아진다.
민식: 어? 돈이다!
태연: 이게 뭐시여?
태연, 바닥에서 지폐 다발을 한 움큼 집어 든다.
병철: 느자구없는 것들이, 뭔 짓거리여! 손대지 마! 만지지 말라고!
태연: 워메, 여따 꽁쳐두고 있었구만? 아부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요?
민식: 태연아, 일단 그만둬. 아버지도 그만해요!
병철, 민식, 태연 너나 할 것 없이 뒤엉킨다.
엎어진 케이크와 미역국으로 범벅이 된 돈다발.
은희: 무슨 꿈 타령 하나에 자발들을 떨어대는 거냐?
병철: (태연을 붙잡으며) 나가 시상에 호래자식을 내놨당께!
민식: 진정 좀 하세요. 이러다 숨넘어갑니다!
태연: (뿌리치며) 누가 가져간다 혔어? 기냥 세어보기만 현다고!
병철: 이 년이 가장 문제여! 애비 말이 홍어 거시기로 들리냐? 이것아, 안 놓냐?
태연: 아따, 참말로 얼맨지 시어보기만 현다니께!
병철: 안 놔? 요것이 애비 돈을 껄떡대고, 기냥 눈깔이 확 뒤집혀 부렀구만!
병철, 태연의 뺨을 후려친다. 정적이 흐른다.
태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노려본다.
태연: 시방 혁대로 후려치던 그 손버릇을 여태 못 버리구 또 손찌검이요?
병철: 요, 요것이 말하는 뽄새 좀 봐라, 어서 이런 막돼먹은 가시내가 나와가지고. 이젠 허다허다 애비 돈에 손을 갖다 대냐?
태연: 나가 인자 얻어 맞고도 가만히 있는 기집이 아니여, 다 컸다 이 말이여!
태연, 케이크 칼을 주워서 허공에 번쩍 들면,
은희: 안돼!
병철: 아이고! 자석 놈이 애비한테, 애비한테! 아이고, 골이야, 골이야!
병철,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은희: 워메, 민식이 아부지!
민식: 아버지! 괜찮아요? (태연에게) 야이, 호로새끼야!
태연: …뭐시여? 나 암것도 안 혔어!
민식: 이 자식이 이제는 패륜을 서슴지 않네. (병철을 흔들며) 아버지, 일어나세요! 아직 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태연: 참나, 저 여시 같은 인간. 닿지도 않았는디 회까닥? 아주 징해부러라···.
태연, 케이크 칼을 내려놓고 돈을 살핀다.
민식: 돈 줍지마! 아버지 쓰러졌잖아!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민식, 태연을 붙잡으면,
태연, 민식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태연: 그따구 명령조로 지껄이지 말어!
민식: 이 새끼가 진짜.
민식, 주먹을 치켜들면,
은희: 진정해라, 다 설명해 줄라니까. 응? 둘 다 내려놔라.
태연: 돈의 출처부터 알아야 현다고. 요거시 시방 아부지 돈이 맞어? 집안에 현찰을 요로코롬 짱박아 뒀다고? 밤낮 돈 읎다고 노랭이질하던 인간이?
민식: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이 짓거리 하는 건 맞아?
은희: 피보다 진한 게 돈이라더니, 그만 안 하냐?
태연, 민식에게 머리를 들이민다.
태연: (노려본다) 쳐, 쳐보랑께? 둘 중 한 놈은 오늘 제삿상 치르는 거시여.
민식: (손목시계를 푼다) 이 자식이, 간만에 피를 끓게 만드네.
은희, 냄비를 집어 들고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진다.
은희를 쳐다보는 민식, 태연.
은희: 너희들 아버지 아프다! 맨날 죽은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고 하지를 않나,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다. (약 봉투를 보이며) 이봐라, 약도 안 먹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잔단 말이다.
민식, 태연 씩씩대며 떨어진다.
은희, 병철을 살핀다.
민식: 어머니, 구급차라도 부를까요?
은희: 다행이다. 잠깐 정신을 잃은 거야.
태연: (한참을 보다가) 이것두 연기 아니여? 와, 그 있잖어. 비암이 나타나믄 깨꼬닥 죽은 척허는 개구락지 맹크롬.
은희와 민식, 태연을 보고 한숨을 쉰다.
민식: 너 그게 할 소리냐?
태연: 엄니, 요참에 깨끔허게 단도리를 칩시다.
은희: 뭘 쳐?
태연, 돈다발을 은희에게 쥐여 준다.
태연: 이왕 이래 된 거, 같이 뜹시다. 나가 시방 돼지꿈을 꾼 거시 뭔 뜻인지 이제야 알겄어요. 엄니, 내랑 같이 살어요. 같이 요 뭣 같은 집안, 확 떠불자니께요.
은희, 아무 말 없이 돈다발을 바라본다.
민식: 쓰러진 아버지 앞에 두고, 터진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해?
태연: 내는 집안서 뭔 말도 못 혀?
민식: (태연의 머리를 밀친다) 넌 성격 괴팍한 것이 아버지랑 똑 닮았어.
태연: 뭐시여? 오빠가 내한테 이럼 안 되는 거시지.
민식: 내가 틀린 말 했냐?
태연: 안 여물어? 나가 그동안 월매나 참았는지 알어? 아부지가 나를 상고에 왜 보냈는지 모르제? 시골 동네서 기집애는 개천에 용 날 수가 없다드라고. 언능 취업혀서 오빠 학비나 보태라 그라드라고. 고거이 벌써 십 년 전이여! 내는 뭐, 하고 싶은 게 없는 줄을 알어? 근디 다른 놈도 아니고 우째 오빠가 그라고 느자구없는 말을 헐 수가 있어? 진장 염병할 집안!
민식: 뭐? 저 툭 터진 주둥이를 아주 그냥….
민식, 태연의 얼굴을 부여잡는다. 두 사람, 낑낑대며 악다구니를 쓴다.
태연: 시상에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는디, 요 집안은 귀한 아들래미 뒷바라지할 씨는 따로 있당께!
은희: 그만해라. 입 아프다!
민식: 그래! 이 자식아! 악 좀 그만 써라. 까놓고 그게 내 잘못이냐? 내가 너한테 은행 가라고 시켰냐고 인마.
민식, 태연을 바닥에 패대기친다.
은희: 첫째야, 그만은 네가 해야 할 것 같다.
민식: 저요? 아니, 저 파렴치한 놈이 지금 아버지 돈에 눈깔이 뒤집어져 가지고는….
은희: 뭐? 아버지 돈?
태연, 대자로 뻗어 발버둥친다.
태연: 그려! 눈깔 뒤집어졌다! 눈깔을 뽑아다 오독오독 씹어 묵어부러라!
민식: 저도 돈 빌리러 왔다지만, 아버지 돈에 손을 대는 저런 패륜아가 어딨어요?
은희: 아버지 돈? 아버지 돈에 손을 대?
민식: 네, 아버지 돈이요.
태연, 누워서 돈다발을 허공에 뿌린다.
태연: 더러븐 집구석, 기냥 다 같이 뒷간에 콱 빠져 디져 불자!
은희, 민식에게 다가간다.
은희: 첫째야, 넌 왜 이 모든 게 당연히 네 아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민식: 네?
은희: ···그래, 너희들은 어릴 적부터 돈에 관한 것은 전부 아버지한테 말하고는 했지. 문구점에서 연필 한 자루를 사더라도 밥상머리 앞에서 국그릇 내다 주는 이 어미한테는 일언반구 않고 그저 아버지 눈동자만 멀뚱멀뚱 쳐다보곤 그랬지.
민식: 갑자기 무슨 서운한 말씀이세요.
태연, 버둥거리며 돈다발 사이를 헤엄친다.
은희: 너희 아버지는 쩍쩍 갈라지고 마디가 툭 터진 손이 무슨 훈장인 것마냥 꺼드럭대는데, 니들이 이 어미 손을 본 적이 있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하루 열두 시간 서 있던 몸뚱이 끌고 와, 밥 차려주던 이 손을 본 적이 있어?
민식: 어머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은희: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것을 너무 쉽게 남한테 맡겨 버렸어. 다들 이렇게 악을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면서 사는데, 어째서 나는 한 번도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민식: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아버지 일어나면 차분하게 얘기를 하시죠.
은희: 아니다!
민식: 네?
은희, 동수의 영정사진을 본다.
은희: 그래, 오늘 하루라고 했지? 분명 하룻밤이라고 했지? 돈에 발이 달린 것 마냥 오늘만큼은 이 인간 손에서 전부 떠난다고 했지?
민식: 하루요?
은희, 돈다발 틈에서 통장과 집문서를 꺼낸다.
은희: 나한테는 이거 필요 없다. 이참에 내다 버리자….
민식: 다 버리자고요?
태연,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태연: 엄니, 고거이 무슨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여?
은희: 오 년이다! 오 년! 너희들이 돈 때문에 집구석에 오는 것이 오 년 만이다! 니들 아버지는 평생을 제 것처럼 하고 살았는데 왜 나는 하루도 내 것이라고 못해? 이 어미는 왜 하루도 제 것처럼 하지 못하냐 이 말이다! 오늘은, 하루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나도 그럴 수 있는 거야.
민식: 어머니···.
태연: 오라질 것! 뭘 고로코롬 실없는 소리를 혀요? 콱 기냥 뜹시다!
은희, 통장과 집문서를 갈가리 찢어 버린다.
은희: (돈다발을 걷어차며) 이거 전부 갖다 줘 버려라. 이까짓 거 들고 있다고 악다구니 쓸 일 없는 사람들한테나 줘 버려라.
민식: 네?
은희: 싹 다 복지원에나 줘버려라.
태연: 환장하겄네! 이 돈으로 나랑 대대손손 먹고살아야제!
민식: 기부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은희: 그래, 가지고 가라. 다 가지고 가 버려. 얼른 들고 사라져라….
태연, 돈다발을 벽에 던진다.
태연: 진장, 염병할! 나 안 가! 오함마로 손모가지를 찍든, 도끼로 발모가지를 끊든, 여서 한 발자국도 안 갈 것잉께 그리 알어!
민식: ···저 자식은 돈에 한 맺힌 악귀가 든 게 분명해요.
태연: 그려! 나 돈에 허천났다! 배때지를 찢든, 대그빡을 부수든 혀라! 나 안 가!
민식: 어머니, 이놈은 제가 구마를 하든 굿을 치든 해서라도 끌어낼게요.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상관이 없지만···.
은희: 너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니다.
태연: 뭣 같은 시상! 또 아들래미 몫이여?
민식: 이제는 어머니 앞에서도 막말을 하네!
태연: 돼지꿈은 육실헐, 팔자가 개팔자인디···.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낸다) 냄들은 뭐 잘만 풀린다드만 또 꽝이네? 난 태생부터 허벌나게 꼬여부렀어. 사는 것이 요로코롬 뺑이치다 뒤질 개꿈이라니께!
민식, 태연을 붙잡으려 하면,
은희, 태연을 꼭 끌어안는다.
은희: 이것아, 돼지꿈은 무슨 돼지꿈이냐···. 정신 좀 차려. 세상이 돼지우리다. 눈을 씻고 봐도 똥 묻은 돼지 새끼들이 지 몸에 묻은 것이 황금이나 된 줄 알고 똥밭을 뒹굴고 사는 거란 말이다. 너까지 돼지가 되면 어미는 어쩌란 말이냐. 이빨 드러내면서 컹컹 짖는 개처럼 살어. 차라리 개처럼 악을 쓰면서 살란 말이야.
태연: 엄니, 요것이 참말로 사는 것이 맞어? 내는 우째 악쓰고 살아야 쓰는디? 내는 우째 악을 써야만 되는 것인디? 우째 꽥꽥 소리를 써야만 들어주는 것인디?
은희: 누가 네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지금처럼 소리를 꽥꽥 지르고 악을 단단히 써 버려. 절대 빼앗기면 안 돼. 이 어미처럼 살지는 말어. 그냥 그렇게 살어….
태연: 시방 나도 기냥 살고 싶단 말이여. 기냥 살고 싶다 이 말이여.
태연, 서럽게 운다.
은희,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워서 태연에게 쥐여 준다.
은희: 굶지 말고 가는 길에 따뜻한 밥이나 한 숟갈 떠. 글고 다 잊어. 그깟 꿈 얘기, 싹 잊어버려.
태연: (돈을 쥐고) 진장, 드러븐 돈, 드러븐 집구석···.
민식, 감자 박스에 돈을 쓸어 담는다.
민식: 익명으로 후원하면 아버지도 모를 거예요. 근데 정말 후회 없으시겠어요?
은희: 괜찮아. 다 필요 없다. 나는 필요 없어.
민식: 아버지는 어쩌죠? 가만히 있진 않으실 텐데.
은희: 그놈의 아버지, 지긋지긋한 아버지.
민식: 죄송해요. 걱정이 되어서···.
은희,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있는 병철을 바라본다.
잠꼬대를 하듯이 몸을 움찔거리는 병철.
은희: 또 꿈을 꾸는 모양이구나. 이 인간 깨어나기 전에 가라.
민식: 괜찮으시겠어요?
은희: 걱정할 거 없어. 원래부터 내 것이었어. 다 내 몫이었어. 얼른 가, 어서 가라….
민식: (태연을 걷어찬다) 일어나! 아버지 깨어난다! 이제 가자!
민식, 감자 박스를 집어 들면,
태연,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일어난다.
태연: 엄니, 사실 핸드폰 안 바꼈어요. 연락 자주 헐 것잉께….
민식: 핸드폰 바꾼 것도 거짓말이었냐?
태연, 은희와 포옹한다.
병철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다.
은희: 애들아, 얼른 가라, 얼른 가.
민식: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구정에는 과일이라도 한 박스 사서 올게요.
태연: 엄니….
민식, 태연을 끌고 퇴장한다.
은희: (무대 밖으로) 그래, 연락들 자주해라. 밥 잘 챙겨 먹고, 뛰지 말아라 다친다···.
병철, 잠꼬대를 한다. 은희,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보다가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병철, 요람에 싸인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다.
3장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은희는 가구를 재배치한다. 무대 밖에서 옷장과 수납장을 들여와 제자리에 두고, 누런 벽지에 가족 사진도 건다. 선반에 제대로 놓여 있는 동수의 영정사진. 규칙적으로 코 고는 소리가 울리는 와중에, 은희는 병철에게 다가가 고깔모자를 벗긴다. 순간 잠에서 깨는 병철.
병철: 아부지! 아부지!
은희: 이 양반이 또 꿈을 꿔?
병철: (끙끙 앓는다) 아부지!
은희, 병철을 흔든다.
은희: 왜 자다 말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구 소리를 꽥꽥 질러대? 일어나….
병철: 어? 당신이여?
은희: 자다가 뭐라도 봤어?
병철: 아부지가 꿈에 나왔구만!
은희: 그래? 이번에는 뭐래?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 줍디까?
병철: 그, 글씨 말이여…. (사이) 아니, 근데 우리 돈은? 이 써글 놈들!
병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은희: 돈?
병철: 그려! 여그다 내가 돈을 분명히! 근디 그 호로자슥들이 와 가지고!
은희: 개꿈이야. 당신 꿈을 꾼 거야.
병철: 꿈?
은희: 당신 원래 꿈을 잘 꾸잖아. 돈은 무슨, 귀신이 씻나락 까먹을 소리야.
병철: 꿈? 꿈이라고?
병철, 혼란스러운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은희: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평생 제 손으로 돈은 만져 본 적도 없으면서.
병철: 분명히 아부지가 그렸어, 아부지가!
은희: 아까 전화 왔었어. 민식이랑 태연이한테. 둘 다 서울에서 번듯하게 자리잡았나 봐. 구정에 한 번 내려오겠대. 애들이랑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잖아….
병철: 안 돼! 그것들이 여그 오믄 안 돼!
은희: 그냥 살자, 제발 그냥 살자 우리.
병철: 아버지가 오늘 하루라고 혔어. 하룻밤 안에….
은희: 당신 오늘 생일이잖아. 더 자, 푹 자. 그냥 그 터무니없는 돼지꿈이나 꿔버려.
병철: 꿈? 꿈이라고? 진장 꿈이라고? 워째 혀끝에 엿기름이 배인 만치 달디달다 혔어.
은희, 선반에서 알약과 물그릇을 가져와 병철에게 먹인다.
병철: (약을 삼키며) 아, 아부지. 어따 돈을 넣을까요? 아아, 요참엔 어따 돈을 넣어야 할까요….
병철, 중얼거리며 드러눕는다. 은희도 함께 눕는다.
암전.
▶ 밀리터리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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