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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송혁기의 책상물림]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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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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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분노와 슬픔 가운데 새해 인사를 띄웁니다. 최고 권력자가 저지른 난동이 국민의 일상을 앗아가고 나라 살림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참기 어려운데, 다툴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사태를 지지부진한 정쟁으로 끌고 가는 추악한 모습들을 연일 목도하면서, 분노의 게이지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 위에 벌어진 비극적인 참사 소식에 온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떨려 옵니다. 집단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은, 가혹한 겨울입니다.

견디기 힘든 시절, 묵은 시를 꺼내 읽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라는 말을 건네며 시작하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가 나오고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사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리며 널리 읽혀 왔습니다. 이기적인 삶을 반성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메시지로 보자면 구세군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연말연시에 어울리는 시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소유와 성취, 권력의 우월에서 기쁨을 느끼는 건 소시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도 기쁨을 느끼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런 무관심이 향하는 곳이 각자의 이기적인 삶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해야 할 때 표출하지 않으며 눈앞의 일들에만 얽매여 살아오는 동안, 대의민주주의의 탈을 쓴 누군가는 해서는 안 될 일도 없고 하지 못할 일도 없음을 몸으로 배우며 괴물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는 그 힘겹고 기나긴 길의 끝에, “평등하게 웃어” 줄 수 있는 더 큰 기쁨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쨍하며 가르는 한 줄기 햇살처럼 눈부시게 비치리라 믿습니다.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압도한다 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기쁨의 축복을 전합니다. 슬픔과 분노의 백척간두에서 함께 한 발을 더 떼는 그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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