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1기 말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시위대 軍 투입 막고 충동적 명령 예방
2기 출범 앞둔 美의 ‘불길한 민주주의’
권력자 ‘무력 사용’ 통제장치 보강해야
이철희 논설위원 |
#1. 2020년 6월 1일, 긴급 호출을 받고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짜고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마구 팔을 흔들면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격렬해져 백악관 인근 저지선까지 뚫리자 트럼프는 즉각 ‘반란법’을 발동해 군대 1만 명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트럼프는 외쳤다. “그냥 쏘면 안 되나? 다리나 뭐라도 쏘라고.” 에스퍼가 여러 이유를 들어 할 수 없다고 하자 트럼프는 밀리를 향해 “그럼 장군이 맡아 처리해”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밀리 역시 거부했다. “저는 보좌관일 뿐 지휘관이 아닙니다.” 미 합참의장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조언자 역할만 수행한다.
결국 트럼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약해 보이고 국가가 약해 보인다고. … 너희들은 모두 실패자야, 빌어먹을 실패자들!” 그 자리에 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마저 꼼짝없이 모욕당해야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끝내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했다. 에스퍼는 회고록 ‘신성한 맹세’에 “당시 우리는 어두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기 직전에 있었다”고 썼다.
#2. 2021년 1월 8일, 밀리 의장은 극비 막후채널을 가동해 리줘청 중국군 연합참모장과 통화했다. 이틀 전 트럼프 지지 세력의 의사당 난입 폭동에 놀란 중국 측은 트럼프가 대외 위기를 조성해 반전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밀리는 말했다. “상황이 불안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100% 안정적이다. 민주주의도 때론 엉성할 수 있다.”
트럼프는 11·3 대선 패배 이후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끝없는 부정선거 음모론과 자기만의 가상현실에 빠져 있던 트럼프가 벌일 수 있는 충동적 군사행동, 특히 그에게 맡겨진 ‘핵 버튼’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었다. 에스퍼가 이미 대선 직후 경질된 상황에서 그 위험을 막을 사람은 밀리밖에 없었다.
밀리는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극도의 정신불안에 빠졌던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대통령의 어떤 명령에도 자신과 합참의장의 확인 없이는 따르지 말 것을 군 지휘부에 지시했다. 밀리는 즉시 국가군사지휘센터(NMCC) 장교들을 불러 모아 모든 명령 이행은 자신을 거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교 한 명 한 명 눈을 바라보며 일일이 묻고 확인했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밥 우드워드의 ‘위험’)
#3. 2024년 봄 어느 행사장. “너는 우리 타깃 목록 1번이야.” 한 남자가 밀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조롱했다. 2023년 9월 퇴역한 밀리에게 이런 위협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직 합참의장으로서 그는 전역 후 2년간 24시간 경호를 제공받는다. 거기에 상당한 개인 비용을 들여 자기 집에 방탄유리와 방폭커튼까지 설치했다.
트럼프는 밀리가 중국 측과 통화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끔찍한 반역이다.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측근들은 이제 트럼프에게 등 돌린 이들에 대한 보복을 공공연히 외친다. 이른바 깨어 있는(woke) 장군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다짐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후보를 두고 온갖 논란이 이어져도 트럼프가 지명을 철회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1기 행정부 시절 예비역 대장 두 명이 자신을 공개 비판하자 전역한 장교라도 현역으로 소환해 군사재판에 넘기는 군 통수권자의 특별권한을 사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당시엔 밀리와 에스퍼가 역풍을 낳을 뿐이라며 트럼프를 막아섰지만 이제 자신들에게 내려질 소환령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4.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 직후 한국 국회에서 벌어진 광경은 2021년 1·6 미국 의회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건 모두 집권자가 권력의 연장 또는 확대를 위해 헌법기관을 유린한 친위 쿠데타(self-coup)였다. 다만 차이는 분명했다. 국민의 대의기구를 습격한 주체가 한국에선 대통령 명령에 따른 군대였고, 미국에선 대통령 선동에 따른 군중이었다.
트럼프 역시 군대라도 동원하고 싶었겠지만 헌법 등 제도적 가치가 몸에 밴 군인들의 저항에 가로막혔다. 윤석열 앞에도 장벽이 있었지만 그는 일부 충성파로 비선을 만드는 우회로를 통해 밀어붙였다. 실패했다고 해서 ‘아니면 말고’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1·6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탓에 트럼프 2기라는 불길한 시험대에 다시 섰다. 한국이 12·3을 철저히 심판하고 권력의 사용(私用)을 막을 통제 장치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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