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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박정희에 '인권 탄압' 비판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100세 일기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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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힘써왔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0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깊은 애도를 표하며 카터 전 대통령의 업적과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30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카터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국민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카터 전 대통령은 국제평화와 민주주의, 인권 등 인류 보편 가치 증진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특히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증진에도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며 "우리는 국민과 함께 카터 전 대통령의 정신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명의의 조전을 발송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AP> 통신은 29일(현지시각) 카터 전 대통령이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통신은 그가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진단을 받은 뒤 여러 치료를 받았으나 지난해 2월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했으며, 이후 남은 기간 자택에서 호스피스를 통해 돌봄을 받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보도했다.

1924년생인 카터 전 대통령은 올해 100세로, 1977년 제3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76년 제럴드 R. 포드 공화당 후보에 승리하면서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으나 물가를 비롯한 경제 문제로 인해 많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결국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공화당 후보에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그런데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오히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82년 카터 센터를 출범한 이후 부인인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벌이면서 봉사활동에 나섰고 중동 및 아시아 지역의 평화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1994년에는 북한 평양에 방문해 김일성 당시 주석을 만나며 1차 북핵 위기를 해소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 주석과 만나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데 합의했고, 이후 그해 10월 북미 양측이 제네바 합의에 이르면서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이후 2002년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 중동 지역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0년 버락 오바마 정부 당시 미국 국적의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의 석방을 위한 방문이었는데, 당시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다음해인 2011년 4월 카터 전 대통령은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브룬트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등 전직 국가 수반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 3명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 때도 김정일 위원장과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김 위원장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전한 친서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언제든지 만나 모든 주제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고 카터 전 대통령이 밝히기도 했다.

이후 카터 전 대통령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설전을 벌이며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 <뉴욕타임스>의 '선데이 리뷰' 인터뷰를 통해 북미 양측 지도자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방문할 의사가 있다고 의지를 보인 바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인권과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중시했고 이를 외교에도 투영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연재했던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인권 정책과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정권을 아주 난처하게"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서 이사장은 "카터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비판했다. 박정희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1977년 3월 4일 대통령의 비공개 어록이라고 김충식 책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남의 나라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인권 문제만 해도 왜 북한에 대해서는, 또 크메르와 월남의 인권은 말하지 않는 건가'"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서 이사장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인권이 미국의 대한 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장 해제는 어렵겠지만 유의하겠다는 답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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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방문한 지미 카터(왼쪽) 전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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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전 대통령은 방한 기간 동안 민주화 및 인권 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서 이사장은 "박정희 정권은 1979년 6월 13일, 카터 방한 선발대가 서울에 온 그날부터 민주화 운동 및 인권 운동 세력, 그러니까 정치인이건 목사건 신부건 전직 교수건 여러 활동가들이건 그런 사람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거나 연금 조치를 취했다"며 "그런 속에서 카터는 박정희와 싸우면서 박정희가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서 이사장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재야 종교계 대표자 12명을 비롯해 김수환 가톨릭 추기경 등을 만났는데, 김대중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서 이사장은 "(카터 전 대통령이) 밴스 국무부 장관한테 성난 어조로 "박 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는 한이 있어도 김대중을 만나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결국 만남이 이뤄지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한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9일 영부인인 질 바이든과 공동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다음달 9일을 카터 전 대통령의 애도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카터 전 대통령은 연민과 도덕적인 청명함으로 질병을 근절하고 평화를 구축했으며 시민권과 인권을 증진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촉진했다"며 "노숙자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항상 우리 중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구하고, 고양시키며,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이들은 "카터 전 대통령은 위대한 인격과 용기, 희망과 낙관주의를 지닌 사람이었다"며 "우리는 그와 (아내인) 로잘린이 함께하는 모습을 항상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역시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루스소셜'의 본인 계정에서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에 반대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는 미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 점에 대해 최고의 존경을 표한다"는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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