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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12월 3일, 국민과 의원이 막은 건 비상계엄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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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가 내란이었음은, 계엄선포 조건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정의한 헌법 77조 1항을 위반했기 때문이 크다. 그러나 만일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벌어졌다면 비상계엄은 정당성을 확보했을 것이다. 내란 실패 후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우리 군 일부가 실제로 이를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평양 상공에 대한 무인기 출격, 오물풍선에 대한 원점타격 대응, NLL에서 북의 공격 유도 등 이른바 '북풍' 공작이다.

그런데 이게 먹히지 않자 '서풍' 공작을 시도했었나보다. 북한군의 우끄라이나 참전설이다. 북한군이 대거 우끄라이나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곧 참전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왔던 것이 지난 10월 초였다. 주로 우끄라이나 정보당국을 정보원으로 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이 간절했던 우끄라이나 측의 정보조작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국가정보원이 이를 덥석 물었던 것이 10월 18일이었다.

이후 수차례 북한군의 우끄라이나 참전이 사실인 것처럼 발표되었으나, 적어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 이전에는 확실한 증거로서 입증되지 않았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가 북한군의 교전과 사망자 발생을 사실로 인정한 것은 12월 16일이었으나, 이마저도 아직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서풍'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란 실패 이후 주목할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이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국회에 제출한 메모지가 우끄라이나 안보 당국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다 깊은 곳에서 이번 계엄 선포와 우끄라이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국정원이 러시아어 능통자를 HID 요원으로 모집하고, 이들을 북한군 복장을 입혀 우끄라이나로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운 정황이 있었다는 분석도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엄 선포 소식에 일본의 개헌론자들이 반응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12월 4일 새벽,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会)의 바바 노부유끼(馬場伸幸) 전 대표가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일본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며 "헌법개정으로 긴급사태 조항을 정비해야 한다"는 글을 'X'에 투고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비판 목소리가 커지면서 오히려 헌법개정론의 입지는 협소해졌으나, 한국 헌법에 계엄령 해제 규정이 있었기에 사태가 진정되었다면서 긴급사태 조항과 관련한 헌법개정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일어나지 않았던 '서풍', 실패한 내란 기도, 그리고 역풍을 맞은 헌법개정론의 조합은, 북한의 우끄라이나 참전 공작이 계엄 선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어서 일본의 헌법개정론에 불을 붙이는 발화점이 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1970년대 한일유착을 주도한 국제승공연합의 검은 그림자가 되살아나려 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 9월 일본에서 세계승공대회가 개최되었다. 세계반공연맹의 리더는 야로슬라브 스떼쯔꼬(Yaroslave Stetsko)로, 그는 나치를 지지하며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스떼빤 반데라(Stepan Bandera)와 함께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이끌었다. 또 하나 기억해둘 이름이 미꼴라 레베드(Mykola Lebed)다. 반데라의 측근이었던 그는 전후 미국 CIA에 채용되어 냉전의 전위에서 활약했다.

탈냉전기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던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 2013년 겨울부터 2014년 봄까지 키이우에서 일어난 반 야누꼬비찌 운동의 와중에서였다. 2016년에는 네오나치로 지목되는 아조우 대대의 정당조직인 국민군단(National Corps)이 창설되었다. 이 사실은 2022년 이후 우끄라이나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전개되는 한일관계의 한 단면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최근(2024년 10월) 일본인으로 귀화한 안드리 나자렌꼬(Andrii Nazarenko)는 우끄라이나의 전쟁과 일본의 헌법개정을 잇는 고리다. 그는 자신이 국민군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국민군단이 창설된 것은 2016년인데, 그가 일본에 유학생으로서 입국한 것은 2014년이다. 그사이 그가 어떠한 경위로 국민군단의 일원이 되었는지, 일본에서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국민군단이 창설된 2016년 나자렌꼬가 일본에 이름을 알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해 8월 15일 야스꾸니신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우끄라이나 유학생 신분으로 연설한 것이 주목을 끌었다.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고 야스꾸니 참배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그는 우익 미디어를 중심으로 헌법개정의 필요성과 반한, 반중적인 주장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역사부정주의와 논조를 같이 하는 언론활동을 펼쳤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는 우끄라이나 지원을 요청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주된 무대가 대표적인 우익집단인 일본회의이며, 통일교 계통의 국제승공연합이나 승공 유나이트(勝共UNITE) 등이 개설한 채널이 이를 업로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다른 우끄라이나인, 안드리 구렌꼬(Andrii Gurenko)는 2016년 일본에서 우익운동의 중심 가운데 하나인 APA일본재흥재단이 실시하는 제9회 <'진정한 근현대사관' 현상논문>에 지원하여 학생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던 것을 계기로 일본사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게 안드리 나자렌꼬가 대중에 얼굴을 알렸던 것과 같은 해이며, 국민군단이 창설된 것과도 같은 2016년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인지, 모종의 배후가 기획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구렌꼬는 2022년 우끄라이나전쟁 발발 이후로는 우끄라이나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헌법개정을 통한 일본의 안보태세 강화를 호소하는 강연회를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그가 활동하는 무대도 주로 일본회의가 마련해주고 있었다. 최근 그는 북한의 우끄라이나 참전설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북한의 참전은 시간의 문제라며 일찍이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으며, '북한의 침략행위'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우끄라이나에 대한 무기 확대와 러시아 국내에 대한 공격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하다가 만난 조직이 포스트-러시아 자유국가포럼(Free Nations of Post-Russia Forum)이다. 이 포럼은 러시아의 반정부 활동가와 분리주의자 등, 러시아 붕괴를 주장하는 그룹의 회의체로 우끄라이나전쟁 발발 후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회는 점차 비대해져서, 그간 브뤼셀의 유럽의회 의사당이나 필라델피아 시청사 등에서 개최되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토오꾜오에서 제7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두명의 안드리, 나란제꼬와 구렌꼬가 참석했다. 올해 9월에 열린 제12회 대회에서도 안드리 구렌꼬가 참석하여 강연했다. 이제 그의 활동의 범위는 포스트-러시아 자유국가포럼이라는 국제적 조직을 타고, 대만에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2024년 12월 3일, 국회 앞에서, 국회 안에서 한국 국민과 국회의원이 막아낸 것은 계엄만이 아니었다. '북풍'과 '서풍'을 막고, 일본의 개헌의 흐름을 막고, 한일 동맹화의 흐름을 막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흐름은 집요하다. 계엄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프레시안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한 4일 새벽 군 병력이 국회에서 철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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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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