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오페라 시장의 현주소
세계적 성악가들을 대거 캐스팅했지만 개막일 연출가 하차 등 잡음에 휩싸인 ‘어게인 2024 투란도트’. [사진 2024투란도트 문화산업전문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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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연극도 이렇게는 안하겠다!”
22일 오후 7시50분경. 서울 삼성동 코엑스 D홀에서 오페라 ‘어게인 2024 투란도트’ 개막 공연을 기다리던 한 신사가 이렇게 외치며 공연장을 빠져 나갔다. 최고가 100만원짜리 공연을 보러 와서 좌석을 찾지 못한 것. 7시30분으로 예정된 개막은 설명없이 지연되고 있었고, 문 밖에서 미처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객석에서도 “힐링하러 와서 분노하고 있다” “관객은 호구가 아니다”라고 소리를 높였다.
지친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개막을 재촉하니 그제서야 세계적 테너 출신의 지휘자 호세 쿠라가 달려와 막을 열었다. 공연은 호사스러웠다. 요즘 가장 핫한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은 명성에 걸맞은 카리스마를 과시했고, 세기의 디바 안나 네트렙코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테너 유시프 에이바조프가 부른 ‘공주는 잠못 이루고’도 특유의 메탈릭한 음색과 파워풀한 성량이 합격점이었다.
예술과 경영이 엄청난 간극을 드러낸 현장이었다. 민간 제작사인 2024투란도트 문화산업전문회사가 2003년 상암월드컵경기장 야외오페라 흥행 신화를 재연한다는 포부는 거창했다. 제작비 200억원을 들여 열흘 간 6800석 규모 대형홀에 ‘황금의 성’을 짓는다고 했다. 박현준 총예술감독은 “매년 유명 가수들이 찾는 페스티벌 규모로 키워 세계 오페라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고, 세계적 소프라노 마리아 굴레기나를 비롯해 12개국 오페라 스타들을 캐스팅했다. 지난 6월 밀라노 라스칼라에서 뉴 프로덕션을 올린 다비데 리베모어 연출, 플라시도 도밍고 지휘 등의 이름값도 가세했다.
그러나 티켓 판매가 부진하자 객석 규모를 2800석이나 줄였고, 없어진 좌석을 예매한 200여명이 ‘좌석 업그레이드’를 기다리다 관람을 포기하며 대규모 환불사태가 발생했다. 예매처 관람후기엔 “1점도 아깝다” “남의 돈을 우습게 아는 사기 수준”이라며 제작사를 향한 비난이 거세다. 23일 현장에서 만난 조정필 제작총감독은 “운영이 0점”이라고 인정하며 “밤 새워 좌석을 재정비해 더 이상의 혼란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날은 주인공 칼라프가 컨디션 난조로 1막 후 교체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박현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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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된 파행이었다. 지난 10월 솔오페라단이 전설적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의 2010년 버전을 리바이벌했던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 투어 공연과 마리아 굴레기나 캐스팅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개막 당일 오전엔 연출가 다비데 리베모어가 프로덕션과 결별을 선언했다. 박현준 감독이 2003년 장이머우 연출 버전의 무대동선을 복제할 것을 주문하자 리베모어는 “위대한 예술가의 모방을 강요한다”며 자기 이름을 빼라고 했고, 이 과정에서 리베모어 연출팀의 개런티 지급 문제로 갈등이 시작됐음이 밝혀졌다. 박 감독은 “외국 연출가들이 한국을 봉으로 여기며 3배의 개런티를 요구한다”고 주장했지만, 리베모어는 “이번 프로덕션에 한국 가수가 주연으로 출연하지 않는 걸 보니 오히려 박 감독에게 한국 가수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 같다”고 맞섰다.
‘오페라 르네상스’를 논할 만큼 대작 풍년이었던 올해, K오페라의 현주소다. 클래식을 텍스트 삼는 오페라의 예술성은 연출자의 해석이 핵심인데, 대체 누가 이 공연의 연출인가. 박 감독이 26일 후원사인 TV조선 뉴스에 나와 “2003년 장이머우 동선에 따라 내가 연출했다”고 하자, 리베모어는 “그렇다면 왜 수개월동안 내 이름을 홍보에 사용했냐”고 반발했다.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오페라하우스 제작 시스템의 프로토콜이 적용되지 않은 행사지만, 민간의 오페라 제작 수준을 국제 시장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초대형 공연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해외 유명 스타를 동원해 고가 티켓을 팔면서 완성도 면에서 높아진 관객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수연 오페라평론가는 “대형 오페라가 유행하던 2000년대 초반과는 시대가 달라졌다”면서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도 보았듯 이제 대규모 퍼포먼스는 20세기 유물이 됐고, 애초에 오페라는 발상부터 대다수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중극장 규모에서 시작됐다. 유적이 있는 아레나나 엑상프로방스 정도면 모를까 서울에서 보여주기식 경기장 오페라는 필요없다”고 말했다. 이용숙 오페라평론가도 “음향이 엉망이고 객석 단차도 없는 부적합한 장소였다. 아스믹 그리고리안 같은 톱클래스를 보여준 의미는 있지만, 고음에서 전형적인 마이크 깨짐 현상에 그녀도 짜증난 표정이었다. 무대 기술과 공연장 환경도 실망스러웠는데, 제작비 200억을 개런티에 다 쓴 모양”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 공연에서 소동을 일으킨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를 비롯해 세계적 성악가들의 경쟁적 내한은 본고장 유럽에서 쇠락하고 있는 오페라의 라이징 마켓으로 한국이 뜨고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어게인 투란도트’의 연출 공백 사태는 아직도 해외 인력의 이름값에 ‘몰빵’하는 미성숙한 국내 프로덕션의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탈리아 연출팀이 “제작팀이 우리의 동의없이 예술적 결정을 내렸다. 예컨대 연출팀과 상의 없이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수십 벌의 의상이 구매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지나친 해외 스타 마케팅도 오페라 생태계 면에서 물음표를 남긴다. 유럽 스타들이 장기 공연이 아닌 며칠짜리 컨벤션 이벤트에 참여하려면 기회비용으로 훨씬 큰 액수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반면 유학에서 돌아온 K성악가들의 과포화가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한정호 평론가는 “국제 오페라 시장의 일원으로서 협력도 필요하고 민간 제작사가 흥행을 위해 해외 스타를 데려오는 건 당연하지만, 주역급 K성악가들을 포용할 만한 국공립 프로덕션이 몇 개 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복잡한 오페라 음악을 이해하는 기술팀이 아직 부족하기에 외국 인력도 필요하지만, 이미 최고 수준에 오른 K성악가의 시장 불균형은 사회적 인식 개선의 문제다. 이용숙 평론가는 “오페라가 유럽문화다 보니 그동안 서양인 캐스팅을 선호해 왔지만, 이제 기량 면에서 한국인 성악가들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손수연 평론가도 “과거엔 민간 공연에 외국인이 없으면 후원·협찬 자체가 안됐지만 이제 우리도 문화적 자신감이 생겼다. 외국인을 데려와 표를 파는 건 문화사대주의에 근거한 전근대적인 접근”이라며 “이번에 조·단역으로 출연한 한국인들은 들러리만 선 셈인데, 더 이상 MZ성악가들을 이런 굴레에 가둬서는 안된다”고 우려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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