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년사진 no. 93
◇ ‘크리스마스’ 축하식 따뜻한 겨울날 고요한 밤에 천사 같은 어린이들의 거룩한 성탄 기념축하식은 경성에서 첫 번으로 재작일밤 정동 예배당에서 유년 주일학교 주최로 가장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같이 평화로운 말소리는 어린이들의 붉은 입술로 새어 흐른다 (사진은 축하극의 일막)1924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 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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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실린 날짜 이외에 25일자와 26일자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여러 가지 전설 |
◇ 성탄절이란 무엇인가? 12월 20일부터 25일까지를 성탄절이라 하며,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를 축하하기 위해 크게 준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를 명절로 삼아 새 음식을 준비하고 새 옷을 입으며, 서로 새해 축복 인사를 나누고 예물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새해보다 성탄절을 더 성대한 명절로 여긴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조차 이 절기를 하나의 명절로 즐긴다. ◇ 성탄절의 의미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날을 축하하는 명절이다. 하지만 예수가 정확히 어느 날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날에 가족과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지만, 예수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굳이 세상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결과,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존경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찌 그 거룩한 탄생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날을 알 수 없어도,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해 축복하자.” 그리하여 예수 탄생 약 360년 후, 로마에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정하고 축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 왜 12월 25일인가?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정해진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옛날 성도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날이 춘분 무렵이라 생각했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과 비슷한 날에 예수를 보내셨을 것이라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리아가 춘분에 예수를 잉태했다고 가정하면, 12월 25일이 열 달이 되는 날이므로 이 날을 탄생일로 본 것이다. 또한, 12월 25일은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다. 이때부터 태양이 다시 북쪽을 향해 빛을 내기 시작한다. 로마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는데, 기독교인들은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것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 로마와 그리스의 차이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23일까지도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다. 예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한 것도 이러한 로마의 전통적 축하 행사와 맞물렸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희랍(그리스)교에서는 예수 탄생일을 1월 6일로 기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예수를 ‘새로운 아담’으로 보고 1월 6일을 성탄일로 삼았다. 게재지: 동아일보 게재일: 1925년 12월 24일, 석간 |
1924년 12월 26일자 신문에 실린 “구세군과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걸인 수용소 설치”기사도 소개해 드립니다.
◇ 조선 전역은 농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쌓였고, 이는 매일같이 늘어만 갔다. 이대로라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직면한 부유층도 구제책 마련에 나섰으며, 그와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날로 늘어나는 걸인과 고아들을 보며 인도적 차원에서 긴급히 구제를 시작해야 한다고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스미스 목사를 비롯한 유지들이 협의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재작일(12월 24일) 오후 4시 30분, 서대문 밖 외국인학교에서 구빈상담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에 있는 외국인과 조선인 목사들,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대리 소덴(小田) 씨, 경찰부장 대리 삼천 경부(森川警部) 등 40여 명이 모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첫 번째 조치로 고아와 걸인들을 수용할 시설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으로 아래 세 곳을 임시 수용소로 정했다.
죽첨정 구세군 본영
낙원동 제2구세군영
죽첨정 예배당
더 나아가 1925년 1월부터는 서대문통 171번지의 민간 가옥 한 채를 매입해 영구적인 수용소를 설립할 계획도 논의되었다.
이날 위원으로는 네 명이 선출되었다.
구세군 서기관장 대좌 도원의
군쓰 부인
소전 외사과장대리
오극선
◇ 인도적 견지로, 자금은 본영에서
여기에 대하여 구세군 본영에서 ‘도원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업은 인도주의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 착수할 예정입니다. 이 자금은 영국 런던 구세군 본영에서 지원받고, 우리들의 기부와 민간 회사의 후원을 통해 마련할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우리 본영에서는 빈민 1,000명에게 점심을 대접할 계획입니다. 대구에서도 200명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조선의 기근은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를 널리 알려 본국에서도 동정을 구할 계획입니다.”
게재지: 동아일보
게재일: 1924년 12월 25일
오늘은 100년 전 크리스마스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시작으로, 그즈음 기사 두 건을 살펴 보았습니다. 두 건의 기사는, 성탄절이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넘어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했던 극심한 빈곤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 선교사들과 구세군이 펼쳤던 인도주의적 노력을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생명을 잃는 이들이 늘어나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들의 구제 활동은 조선의 빈민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이 되어주었습니다.
특히 구세군과 외국 선교사들의 노력은 단순한 시혜적 행위를 넘어 인도주의와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에 맞서 연대와 자비를 실천했던 당시의 구체적인 노력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러한 나눔과 실천에 있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p.s. 1960년대~ 1980년대 서울의 크리스마스 풍경 사진 몇 장도 감상하시죠.
광화문 우체국옆에 마련된 X-마스실 판매대(1966).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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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크리스마스 이브(1979).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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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거리 성가대(1985).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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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산타클로스(1965).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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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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