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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토)

죽음과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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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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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싱가포르에서 맞이하는 첫 명절이다. 싱가포르는 음력 8월15일을 명절로 지정하지 않아 휴일이 아니다. 한국 학교이기에 추석 당일을 휴일로 지정하고 마침 월요일이 사이에 있어 재량 휴업일로 정해 4일간 연휴로 보낸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음력 8월15일을 중추절로 기억한다. 국가 지정 휴일은 아니지만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월요일 오전,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향한다. 1박2일 일정. 말레이시아는 월요일이 말레이시아 데이, 국경일이다. 우즈랜드 체크 포인트와 JB 체크 포인트 모두 한가하다. 몇 군데를 돌아본다. 단순한 여행을 겸하여 말레이시아 문화도 돌아본다. 이슬람 문화가 강하다. 국경일에 국기와 나란히 월성이 그려진 깃발이 걸려있다. 1900년에 완공되었다는 술탄 아부 바카르 모스크. 색은 다르지만 건축 양식에서 1914년 완공된 전주 전동성당이 연상된다. 좌우 대칭, 팔각형. 그리고 숫자 5와 12.



멀지 않은 곳에 유리 사원이라는 곳도 있다. 사원 안에 여러 성인들의 동상을 만들어 세워 두었다. 1997년에 타계한 테레사 수녀상도 세워져 있다. 파사르 카삿 야시장 근처의 카페에서 잠시 주변을 돌아본다. 이곳에 가끔 들러 수학과 신앙 에세이를 구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슬람과 수학의 관계, 기독교와 이슬람 전통의 관계. 이곳 싱가포르의 달은 한국 보름달과 다르다. 고마운 일상.





2. 어떻게 하면 나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가?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관찰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갖고 있는 잠재력을 깨워주는 과정은 교사로서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문제는 어떻게 깨워줄 것인가다. 교사인 나 스스로 잠재력을 일깨우고 그에 대한 경험이 있다면 좀 낫지 않을까? 어찌 보면 학생들의 잠재력을 깨워준다는 의식 없이 나 스스로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삶을 살아낸다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도 전달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어떻게 나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가? 마음 모으는 일, 바로 집중 연습이다. 바로 지금 여기로 흩어져 있는 마음을 모아 옹근 지금을 사는 연습을 통해 나는 물론 학생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줄 수 있다는 것. 어떤 현자는 지금 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것은 나의 세포 안에 있는 기억의 홈통을 막히지 않게 뚫어주는 바늘과 같다고 했다. 결국 내 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는 가르침인 셈. 마음 모으는 일, 결국 그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온몸과 의식을 동원하여!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 무엇인가를 궁리하고 의도를 갖는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느낌으로 직관으로 나의 삶을 자연스럽게 산다는 경험인 셈. 한번 시도해 봄직하다. 이 마음으로 수학 교실로 향한다. 감사한 하루!





3. 올해 3월부터 쓰기 시작한 수학 에세이. 책과 강의를 읽고 들으며 쓴 글들인데 교정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손대야 할 부분이 많다. 들어낼 부분을 과감하게 들어낸다. 구석구석 보이는 빈틈에 웃음이 난다. 에세이 9번째 글의 제목을 정한다. ‘수학, 조선에 들어오다’. 여기서 수학은 유클리드의 ‘원론’이다. 보이지 않게 들어와 여러 사람에게 읽혔겠지만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한다. 역사적 사실은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 상황에 대한 이해와 상상은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마음이 두물머리에 가 있다. 다산 선생의 배 다른 큰형인 정약현의 아내 장례식에 참석한 고인의 동생 이벽. 이벽의 5대조 할아버지 이경상을 통해 ‘원론’이 조선에 들어왔고 장례식을 마치고 두물머리 강가에서 정약용 형제와 나눈 이야기들. 그리고 이어진 앵무산 자락 주어산에서의 강학회. 이렇게 들어온 수학을 학생들과 마주한다. 강학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수학을 마주하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문제 풀이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을 텐데….



이 모임이 계기가 되어 다산 선생은 정조로부터 ‘기기도설’을 받아 거중기를 제작하고 화성을 축조하게 된다. 이가환 역시 ‘원론’을 충분히 이해한 상황에서 공조판서로 유클리드 원론을 곳곳에 활용한다. AI 수학이 교과서로 등장하는 요즘, 향후 수학교육의 변화되는 모습이 궁금하다.



한겨레

싱가포르 전경.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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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덕경 47장에 나오는 선언무하적(善言無瑕讁)이라는 문장에 한참을 머문다. 잘하는 말은 허물을 남기지 않는다로 해석된다. 싱가포르 한국국제학교에서 8개월째 생활하면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그리고 생각을 갖고 있는 한국인 선생님과 외국인 선생님과 만난다. 말보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만나는 경우가 잦다. 학생들을 대하면서 각자 가지고 있는 학생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의미 있다. 각 교과마다 다른 상황에서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고 한 학생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공유될 때 또 다른 학생에 대한 사유의 시선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 한국인 선생님과 외국인 선생님이 함께 모인다. 학생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 발표자 역할이 주어졌다.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한다. 가르치는 자로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 동료 교사의 자격으로 경험을 나누는 것. 8개월 동안 학생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구체적 사례를 정리한다. 그리고 생각을 함께 나눌 예정이다. 잘하는 말은 허물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다시 들여다본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 ‘나는 산파다’라는 문장과 만난다. 심부름하는 이로서의 역할. 학생들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틔워주도록 돕는 자로서의 역할. 거기까지.



아침 조깅 하러 나선다.





5. 한 문장을 만난다. ‘사람의 몸은 하느님의 영이 땅에서 잠시 머무르시는 여인숙이다.’ 여인숙을 짓는 분, 여인숙을 다시 허물어 버리는 분에 대한 인식이며 고백이다.



죽음은 결국 몸의 소멸인데 하느님의 영이 잠시 머물렀던 여인숙이 부수어지는 것의 다른 표현이 되는 셈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받아들임의 문제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한다.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영에 대하여 깊게 묵상한다.





박진호(수학교사)의 범용일기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마을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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