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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삶과 문화] 땅 위의 노래는 아직 어지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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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추위 파고드는 연말

모임 대신 촛불 들고 광장으로…

서로의 불빛을 지켜내야 한다

아름다움이 폭력보다 강하니까

미칠 것 같은 크리스마스다. 약 먹고 누워서 천장을 보며 뭔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오늘까지 마감해야 하는 이 칼럼이 괴로운 숙제 같았다. 내년부터는 이 칼럼을 쓰지 않겠다고 기자님께 말씀드려야 할까? 근처에 사는 지영 선생님이 뱅쇼 끓였으니 마시러 오라는 톡을 보내왔지만 나는 감기몸살 기운을 옮길 수 없다며 가지 않았다. 외롭고 괴로운 크리스마스다. 조금 전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내가 누더기 차림으로 울고 있는 꿈을 꾸었다. 온종일 기운 없고 열과 콧물이 나더니 어두워질 때 잠깐 잠이 들었다.

나는 물을 끓여 컵에 따랐다. 양손으로 따뜻한 컵을 감싸 쥔 채 책상 앞에 앉긴 앉았다.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쉬지도 못했다. 이토록 심신이 아프고 어수선하며 우울할 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크리스마스다. 하긴 크리스마스엔 즐겁고 축복과 감사가 넘쳐야 할 것처럼 여기니까 상대적으로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이겠지만.

세계일보

김이듬 시인


어제 나는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광장에서 자정 무렵까지 버텼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친구와 영화 보러 가기로 했지만, 개봉 당일 ‘하얼빈’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에 동참하기로 했다. 경복궁 4번 출구 근처에서 붕어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인파 속에서 촛불을 밝혔다. 무대 위에서 젊은 가수가 ‘라스트 크리스마스’ 등 노래를 불러주었지만 캐럴이 장송곡처럼 들렸다. 다른 날의 집회에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는 느낌에 힘겨운 줄 몰랐는데, 어제는 몸살이 오려고 그랬는지 오한이 들고 울분이 커졌다. 왜 우리가 연말에 이 추운 거리로 나와서 소리 높여 민주주의를 외쳐야 하는가. 대다수 국민이 느끼듯이 시대가 역행하고 있는 것 같은 이즈음이다.

미아리 날맹이 위로 뜨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달

망우리 산 너머 망자들의 등 뒤로 뜨는 달

습기를 품은 밤공기는 외로워 외로워

산을 껴안고 눈으로 내릴까

바다에 닿아 바로 풀릴까

땅 위의 노래는 아직 어지럽고

달무리 하얀 피로 번지는데

괴로워 괴로워 우리들은 모두

어디로 떨어지고 있는 유성인가

위의 시는 1981년에 출간된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최승자 시인이 노래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달’이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땅 위의 노래는 아직 어지럽고” 우리는 괴로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다. 마감 앞둔 원고를 미리 쓰자. 마라톤을 해보자. 타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자. 이러한 소소한 결심을 내년 다이어리에 적어보며 혼자 웃어보고 싶은 건데 그럴 의욕마저 꺾어버리는 시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곁에 있었던 이들을 되돌아보며 따뜻하게 서로의 불빛을 지켜내야 한다. 선량함과 부드러움, 아름다움이 폭력보다 강하니까.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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