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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한강 작품 속 ‘그 동굴’을 가다…제주 4·3 유적지서 읽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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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4·3 희생자 헛묘 앞에서 오승국 제주작가회의 회장이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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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온 정심이가 아버지와 함께 숨어들었던 동굴. 이 동굴이 어디인지는 작가만이 알겠지만,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큰넓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24일 오전 정심이가 있었을 것 같은 공간, 큰넓궤 앞에서 소설 속 이 대목이 낭독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토벌대는 제주의 중산간 마을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들을 불태웠다. 죽음을 피한 주민들은 마을 근처에서 하루하루 생활하다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자연동굴인 큰넓궤 입구는 한강의 작품에 나온 것처럼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지만, 굴 안은 당시 120여명이나 생활할 정도로 넓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50여일 가까이 살았다.



굴은 주변에서 눈초리를 번득이는 토벌대에 발각돼서는 안 됐다. 입구를 막은 돌 틈으로는 빛이 들어왔다. 한강은 소설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동굴 입구를 막은 돌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던 기억이 나요.” ‘속솜허라’는 ‘조용히 하라’는 제주어다. 강덕환 시인은 “굴속에서 속솜허라, 입을 막고, 아기가 울면 토벌대에 발각될까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죽은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날 서귀포시 안덕면 지역을 중심으로 ‘작별하지 않는다’ 속 장면과 유사한 4·3 유적지를 찾아보는 ‘평화기행-4·3 유적지에서 되살리는 문학과 기억의 대화’가 열렸다. 제주도가 마련한 이 기행에는 작가단체 관계자들과 4·3 유족회와 부녀회, 청년회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큰넓궤가 발각되자 주민들은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쌓인 눈을 헤치며 한라산으로 향했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발자국을 지우면서 산에 올랐다.



“더 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작별하지 않는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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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만든 시오름주둔소의 성터.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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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올라간 한라산 볼레오름(해발 1375m) 주변에서 주민들은 토벌대에 붙잡혀 죽거나 정방폭포 부근까지 끌려와 학살됐다. 주검은 바다로 떠내려갔고, 어린 자식들은 부모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 유족들은 혼을 불러다 시신이 없는 헛묘를 만들었다.



동광리 헛묘 앞에서 오승국 제주작가회의 회장은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이 헛묘를 만들었다. 동광리에는 이런 시신 없는 헛묘가 많다”고 사연을 이야기했다. 참가자들은 숙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학과 4·3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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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 ‘작별하지 않는다’.


부모가 떠내려간 바다의 생선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소설 속 이 문장처럼 실제로 한 유족은 바닷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유족이 소설 속 이 대목의 모티브인지 모른다.



이날 참가자들은 4·3 때 토벌대의 초토화로 사라진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인 섯단마을도 찾았다. 중문2리의 중심 자연마을이었던 섯단마을엔 15가구가 살았으나 토벌대의 방화로 소개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이곳엔 식수로 사용했던 못과 마을터였음을 알 수 있는 대나무숲이 남아있다. 참가자들은 또 시오름주둔소를 찾아 4·3의 생생한 역사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제주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유적지와의 연계 가능성 등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도 관계자는 “이번 기행은 한강 작가의 소설과 4·3 유적지를 연계해 문학적 시각에서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유적지 활용과 보존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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