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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재야의 양심에서 실패한 보수 정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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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역사다] 장기표 (1945~2024)



장기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945년 12월27일에 태어났다.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자기 한 몸 편하게 살 수도 있었으나,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겪으며 삶이 바뀌었다. 밤에 노동법을 독학하던 전태일은 이런 말을 했다. “내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 대학생 장기표는 전태일의 장례를 주관했고, ‘전태일 평전’을 쓰는 조영래를 도왔다.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의 연대를 꿈꾸었다.



젊은 시절의 장기표는 ‘재야의 양심’으로 불렸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목숨을 걸고 민주화 운동을 했다. 열두해 동안 수배 생활을 했고 아홉해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89년에는 진보 정당인 민중당 창당에 한몫을 했다. 노동 운동과 정당 정치를 이으려 했다. 민주화 운동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과 함께 약 20일 동안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아홉개 나라를 여행했다. 이른바 김우중의 ‘세계 경영’을 옆에서 지켜본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장기표는 재벌의 사회적 순기능과 글로벌 경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그러나 대우의 ‘세계 경영’은 얼마 뒤 파탄이 났고 김우중은 한동안 도망을 다녔다.



장기표는 일곱번을 총선에 출마했다. 일곱번 모두 당이 달랐고, 일곱번 모두 낙선했다. 1992년 민중당, 1996년 통합민주당, 2000년 민주국민당, 2002년 새천년민주당, 2004년 녹색사민당, 2012년 정통민주당. 마침내는 군소 정당을 떠돌다 보수 정당에 휩쓸려 들어갔다. 2020년에는 보수 정당 미래통합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경남 김해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미래통합당은 얼마 뒤 국민의힘이 됐다.



장기표에게 일관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젊어서부터 마지막까지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말년의 주장은 보수 진영에서 밀던 흡수 통일론에 가까워 보인다. 변절이니 배신이니 하는 말로 잘라 말하기에는, 일관된 실패에 차라리 연민이 간다. 올해 9월22일에 세상을 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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