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 소방관 김수정(가명·34)씨가 화학차 뒤에 서 있는 사진. 김씨는 현재 인천의 한 소방서에서 화학차 운전 업무를 맡고 있다. 김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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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소방관으로 일한 아버지를 보며 꿈을 키운 김수정(가명·34)씨는 6년 전 소방 공무원이 됐다. 소방관이라는 직업도, 힘든 상황을 함께 견디는 소방 조직도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현장이었다. 화재를 진압하며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어떤 화마 앞에서도 든든히 시민을 지키는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건 오로지 실력이었다. 성별은 무관할 터였고, 마땅히 그래야 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그토록 사랑했던 조직의 ‘성차별을 시정해달라’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여자가 운전하면 위험하니까.” “여자가 왜 운전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배려’라며 들어왔던 마음을 찌른 말들, 소방관이 아닌 ‘여자’를 주어 삼은 말들을 꾹꾹 눌러 적었다. 소방 조직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화재 현장에 가는 게 너무 감사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습니다.” 김씨가 한겨레에 인권위 진정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들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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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소방관이 되고도 화재 현장에서 여성으로서 자리 잡기 쉽지 않았다. 그는 “화재 현장에 가도 위험하다고 안 들여보낼 때가 많아서, 동료들에게 소방 장비를 가져다주거나 밖에 서 있는 일이 반복됐다. 현장에 다녀와서 같은 대원에게 ‘가만히 서서 놀다 온 거 아니었어?’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했다”고 했다.
그래서 김씨가 택한 것이 늘 인력이 부족했던 ‘화학차 운전’ 업무였다. 화학차는 산소 공급을 차단하는 분말이 담겨 있어 물로 진화하기 어려운 화재에 출동하는 특수 소방차량이다. 그는 “화재 진압은 책임 소재가 보통 지휘관에게 집중되지만 운전은 사고가 나도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해서 대개 꺼리는 업무”라고 했다. 그를 통해서라면 당당히 현장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씨는 “운전 경험과 자격증이 있어서 업무에 자신 있었고, 잘하는 것을 해서 성과를 인정받고 싶었다”고 했다.
그마저 쉽지 않았다. 2021년 7월 인천의 한 소방서로 발령받은 뒤, 화학차 운전대를 잡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운전 경험이 별로 없는 남성 대원에게는 쉽게 운전 업무가 맡겨지고, 운전 사고가 나도 별다른 조처가 없었지만 김씨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소방 출동 차량이 부담된다면 팀 막내가 담당하는 순찰차라도 몰고 싶다”고 말해봤지만, ㄱ팀장은 “나중에”라고 말할 뿐이었다.
1년여 뒤 담당할 사람이 비면서, 화학차 운전 업무가 ‘임시로’ 주어졌다. ‘나중’은 겨우 찾아왔지만, 차별은 그치지 않았다. “눈 오는 날에 여자가 운전하면 위험하니까 여자 있는 날은 차 안 나가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충남 홍성에서 대형 산불이 벌어진 날이었다. 화학차 지원 요청이 왔다. 김씨는 출동을 준비했지만 “짐 빼”라는 말을 듣고, 담당 업무에서 배제당했다. 김씨보다 경력과 경험이 적은 후배들은 이미 현장에 출동하고 있었다. 용기 내 항의하는 김씨에게 ㄱ팀장은 “여자가 장거리 운전하면 얼마나 위험한 줄 아느냐”고 했다.
지난해 7월 김씨는 인사이동으로 다른 소방서에서 일하게 됐다. 옮긴 소방서로도 소문이 전해졌다. ‘ㄱ팀장은 배려했는데 김씨가 성차별이라고 화를 냈다’, ‘김씨가 하극상을 일으켰다’ 같은 내용이었다. 1년여간 참아온 스트레스로 안면마비가 생겨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게 됐다. 김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여성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숨죽일 수 없었다.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팀장 ㄱ씨는 인권위 조사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한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홍성 산불 출동에서 김씨를 제외한 것은 “현장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한 배려”라고 했다.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소위원장 남규선 상임위원)는 김씨가 겪은 일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고용과 관련하여 여성을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으로서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라고 판단된다”고 바로 잡았다. 이어 “보호와 배려의 명목으로 여성들을 특정 업무에 배치하지 않는 것은 성차별적 인식의 또 다른 단면”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인권위 결정문을 읽으며 한 글자 한 글자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차별을 겪었지만, 김씨는 소방이라는 조직을 여전히 무척 사랑한다. 현재 일하는 소방서에서는 문제없이 화학차 운전 업무를 맡고 있다. 업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굴삭기, 드론 등 자격증을 취득했고, 최근엔 현장에서 굴삭기 운전도 했다.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뿌듯하다”고 김씨가 말했다. 뭉개지고 마모됐던 꿈이 다시 움텄다.
“여성 소방관 말고, 그냥 소방관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못하면 똑같이 혼나고 싶고요. 여성 소방관들에게도 남들처럼 ‘일단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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