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영의 '아는 그림'
" 김환기, 1971년의 대표작입니다. 단색화의 토대가 된 이 그림을 오늘 저녁 핸더슨에서 보여드리게 됐습니다. "
3500만 홍콩달러로 시작한 경매가는 빠르게 올랐습니다. “4600만, 새로운 전화 응찰자입니다. 4600만, 4600만에 낙찰됐습니다.” 경매사 에이드리언 마이어가 망치를 땅 하고 치자 장내엔 박수가 터졌습니다. 마이어는 2022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세잔의 ‘생 빅투아르산’을 약 1836억원에 판 경매사입니다.
지난달 26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95억5000만원(수수료 포함)에 팔린 김환기의 1971년작 유화 ‘9-ⅩⅡ-71 #216’. 사진 CHRIST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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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크리스티 홍콩의 아시아·태평양 본부 이전 개관을 기념해 열린 20·21세기 이브닝 세일입니다. 주요 대작들이 나오는 이곳 이브닝 세일에 김환기(1913~74)의 청색 전면점화가 출품된 것은 ‘우주’ 이후 5년 만. ‘9-XII-71#216’이 낙찰가 4600만 홍콩달러(약 78억1940만원), 수수료를 포함하면 약 95억원에 팔렸습니다.
경매에서 거래된 한국 미술품 중 세 번째로 높은 가격, 실은 1~10위 전부 김환기의 전면 점화입니다. 김환기의 점화, 왜 비쌀까요? 더중앙플러스가 짚어드리겠습니다. 서울대에서 미술학 석사,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권근영 기자가 함께합니다.
‘9-ⅩⅡ-71 #216’의 크기(127x251㎝)를 짐작할 수 있는 이미지. 사진 CHRIST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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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52억원(수수료 포함)에 팔린 김환기의 ’우주 5-Ⅳ-71 #200‘. ⓒ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사진 S2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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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바탕에 달과 항아리 그리기 즐기던 김환기는 쉰 살 되던 1963년 뉴욕으로 건너가 변화를 추구합니다. 큰 화면에 달 같은 흰 동그라미를 그린 뒤 드문드문 점을 찍어 보기도 하고, 십자구도의 추상화에 몰두한 해도 있었습니다. 전면 점화를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1970년대였으니 점화에 전념한 건 단 4년, 때 이른 죽음이 아쉽습니다.
15세기 '분청사기 인화문 자라병'을 확대했다. 사진 가나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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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에서 판매된 한국 미술품 중 두 번째로 비싼 김환기의 1972년작 유화 ‘3-Ⅱ-72 #220’. 2018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약 85억원에 낙찰됐다. ⓒ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사진 서울옥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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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환기의 점화는 왜 이렇게 비쌀까요. 100억원을 오르내리는 그림값은 뉴욕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점화에 도달한 김환기가 평생 구경도 못 해본 숫자란 건 아이러니입니다만.
2007년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며, 8년 동안 한국 미술품 경매가 1위를 지켰던 박수근의 1959년작 유화 ‘빨래터’ (50.5x111.5㎝).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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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09(1971)가 47억 2100만원에 낙찰되기 전까지 경매에 나온 김환기 작품 중 최고가는 ‘꽃과 항아리’(1957). 2007년에 30억 5000만원이었다. 점화보다 그의 항아리 그림이 더 비쌀 때였다. ⓒ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사진 서울옥션 |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의 단색화’라는 제목의 대대적인 전시를 기획합니다. 그동안 ‘한국적 모노크롬’이라고 불리던 1960~70년대 추상화에 ‘단색화(Dansaekwha)’라는 고유명사를 붙여주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전시입니다. 시장도 뒤따릅니다. 2015년에는 국제갤러리가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 전시로 ‘한국의 단색화’전을 마련합니다. 김환기를 단색화의 선구자로 삼아 이우환ㆍ박서보ㆍ윤형근ㆍ정상화ㆍ하종현ㆍ권옥연 등의 단색화가들을 조명했습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국제화되면서 1960~70년대 서구 미술계를 휩쓴 추상미술 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흐름으로서 단색화를 전후한 한국의 추상미술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집니다.
1990년대 이건희 회장의 한남동 집무실. 뒤에 걸린 심산 노수현의 '금강산추색'(1960년대)은 이 회장 사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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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로, 주상복합으로, 흰 벽에 층고 높은 집에 살게 되면서 벽에 거는 그림 수요도 달라졌습니다. 박수근ㆍ이중섭의 그림이 ‘한물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들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소품이고 1950~60년대 세상을 떠나 작품 수는 각각 수 백 점, 많이 남기지 못했습니다. 대표작들은 이미 미술관에 소장돼 유통될 만한 수작도 많지 않기에 더는 미술시장을 견인하기에는 어려워졌습니다. 언제고 귀한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면 다시 화제가 되고 제값에 새 주인을 찾겠죠. 이와 달리 김환기는 1만 점 가까이 남겼기에 계속해서 미술시장에 작품이 나오면서 화제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유영국의 추상화가 요즘 국내외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7억2100만원에 낙찰되며 '김환기 전면점화 시대'를 연 1971년작 ‘19-Ⅶ-71 #209’. ⓒ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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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16호 점화가 95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엔 역시나 “점 찍는 거 나도 하겠다” "미술은 그들만의 리그" 같은 댓글이 붙었는데요, “그 돈이면 건물 사서 임대료 받겠다”라는 반응도 있더군요. 그의 점화가 시장에서 부상한 게 2015년 이후라고 말씀드렸죠? 일찌감치 명작을 알아본 이들은 돈을 벌었을까요?
그의 청색 점화 대표작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습니다.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을 받으면서 국내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작품이죠. 김환기도 이를 계기로 전면점화에 전념할 동력을 얻었습니다. 수상작가전 이후 그림은 한국일보 사옥 복도에 한동안 걸려 있었어요. 작품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화가 윤형근(김환기의 맏사위입니다)이 트럭을 구해 가서 그림을 떼어 왔다고 합니다.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제목을 따온 이 서정적 추상화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 수상작으로 전면점화로의 전환점이 됐다. 사진 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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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문해보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90년대 후반 10억원에 거래됐더군요. 당시 시세보다 2배쯤 높은 가격이었는데도 구매자는 거금을 선뜻 지불했다고 해요. ‘우주’의 절반 정도 크기지만 전면 점화로의 본격적 전환이 된 역사성, 그림이 가진 스토리, 완성도 면에서 '어디서 무엇이…'는 153억원에 팔린 ‘우주’ 못지 않은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그림이 시장에 나온다면 100억~150억원 정도 추정, 10~15배 정도 오른 셈이죠. 그런데 그 돈으로 다른 걸 샀다면 어땠을까요? 대작을 미리 알아보는 안목, 내가 일찌감치 후원한 대표작을 국내외 좋은 전시에 빌려줄 때의 뿌듯함, 세계 유일의 작품을 나만이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은 논외로 하고요.
" 택이 아부지, 언마(은마) 아파트를 사이소. "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아들의 바둑대회 우승 상금의 투자처를 고민하는 택이 아빠에게 이웃 주민이 권합니다. 1988년 은마아파트가 7000만원 가량이었다는데요, 1997년에는 2억 7000만원. 지금은 여기서 9배쯤 오른 25억 5000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1997년으로 돌아가 10억원을 쓴다면 은마아파트 4채와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계속)
오래도록 연간 400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한국 미술시장은 지난해 아트페어의 호황으로 1조원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미술품 경매에서 1000만 달러를 넘긴 작품은 김환기의 ‘우주’가 유일합니다.
김환기 점화는 왜 비쌀까요? 왜 좋은 그림일까요? 좋은 작품을 미리 '찜' 해두는 비법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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