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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세계포럼] 기업이 무슨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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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탄핵 이슈 불똥 기업으로 번져

내수·수출 등 경제 지표 잿빛투성이

상의·무협 등 재계가 직접 진화 총력

국회부터 기업 기 살리기 앞장서야

“정치는 사류, 관료 행정은 삼류, 기업은 이류….”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5년 베이징에서 했던 고언(苦言)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세우는 데 도장 1000개가 필요한 게 말이 되냐”던 이 회장이 기업 때리기에만 매몰된 정치권과 관료사회에 던진 파문은 컸다.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졌지만, 정권의 눈 밖에 나면서 한동안 홍역을 치렀다.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의 혼돈 속에서 30년 만에 문뜩 이 말이 떠올랐다. 계엄과 탄핵이 엎질러진 물이라지만 그래도 의구심이 가시질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 경제와 안보에 미칠 파장을 면밀하게 고민했다면 이런 무모한 일을 벌였을까.

세계일보

김기동 논설위원


12·3비상계엄 사태 이후 대통령 탄핵이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불똥은 기업에 튀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요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얼마 전 최 회장은 세계 128개국 상공회의소 회장과 116개 주한 외국 대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서 “최근 일련의 어려움에도 한국 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서 “높은 회복 탄력성과 안정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을 바탕으로 당면한 어려움을 빠르게 극복해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도 세계 68개국 237개의 협력단체·기관에 “12·3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도 한국 경제와 기업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서한을 보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던가. 정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다 보니 기업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던 윤 대통령의 배신이다. 기업과 자영업자들은 ‘멘붕’에 빠졌다. 신인도가 출렁이고 환율이 치솟으면서 손실이 연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내년 경영계획조차 세우지 못할 판이다. 연말과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리던 자영업자들은 절규하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송년회를 권장하고 나섰지만 싸늘하다. ‘회식이 애국’이라는 말이 눈물겹다. 영업사원은커녕 이만한 ‘영업방해 사원’도 없을 듯싶다.

계엄과 탄핵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작을 것이라는 낙관은 금물이다. 2004년 탄핵 때는 활황인 중국 경제가 우리 경제엔 단비였다. 2016년에는 반도체 경기가 받쳐줬다. 지금은 믿을 구석조차 없다.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미 경제매체 포브스는 한국의 계엄 사태를 ‘윤석열의 절박한 스턴트 쇼’라고 규정하며 “이기적인 계엄 선포의 경제적 대가를 5100만 국민이 할부로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암담한 일이다.

각종 경제 지표는 잿빛투성이다. 당장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수출이 ‘트럼프 리스크’에 직면했다. 올해 10월까지 대미 무역흑자는 550억달러를 기록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가만있을 리 없다. 관세를 포함한 무역제재가 예상된다. 가뜩이나 수출 증가율이 내년에 급격히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수출이 부진하면 내수라도 살아나 성장을 견인해야 하는 것이 건전한 국가 경제 운용의 틀이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해법이 마땅찮다.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의 감액 예산으로는 재정 효과는커녕 현상 유지도 힘들다. 국민도 지갑을 닫았다.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때인 2020년 3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이번 계엄 사태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정치가 경제를 어떻게 망치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대통령이 던진 폭탄을 놓고 정치권은 주판알만 튕기며 상대 탓만 하고 있다. 땀 흘리며 일만 해온 기업과 국민이 무슨 죄가 있나.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다. 불안감은 불확실성을 먹이 삼아 커진다.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는 첫걸음은 심리적 불안감을 떨쳐내는 것이다. 실물경제의 주체인 기업의 기를 살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전 세계가 하염없이 한국의 정치 정상화를 기다려 주진 않을 테니 말이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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