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타인의 삶'의 한 장면. 비즐러(오른쪽·윤나무)가 상관에게 감청 작업과 관련된 지시를 받고 있다. 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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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즐러는 체제 유지를 위해 '반동분자'를 고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냉혈한이지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예술적 신념에 동화하며 혼란에 빠진다. 무대는 감청실과 드라이만의 집이라는 이질적 공간을 한데 묶어, 비즐러가 두 세계를 오가며 그림자처럼 드라이만의 곁에 머무는 모습을 그렸다.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연극의 특징 때문에 일부 장면은 영화보다 더 생생해졌다. 영화는 슈타지 감청실과 드라이만의 아파트 내부를 교차해 보여주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주위를 맴돌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본다. 비즐러가 예술인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예르스카(왼쪽·김정호) 드라이만(정승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예르스카에게 닥친 비극은 드라이만을 각성시키고, 드라이만의 변화는 비즐러의 변화로 이어진다. 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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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인간의 선의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맹목적 신념 속에서 기계적으로 일을 수행하던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글과 크리스타의 삶을 엿보며 무너진 인간성을 회복한다. 드라이만은 체제와 적당히 타협하는 대가로 주어진 안정된 삶을 버리고 동독의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출간한다. 드라이만의 변화는 비즐러의 양심에 불을 지피고,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내던진다. '타인의 삶'이 더는 타인의 것만이 아니게 될 때 인간은 선(善)을 실현한다.
무대는 특별한 장식 없이 단출한 소품만으로 드라이만의 집, 비즐러의 도청실, 극장, 술집 등 다양한 장소를 표현한다. 시각적인 구체성을 드러내는 대신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 기법이다.
비즐러의 상관 그루비츠 국장(왼쪽·이호철)이 드라이만의 연인 크리스타(최희서)를 심문하는 장면. 프로젝트그룹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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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다역을 소화한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김정호는 동독 예술계를 쥐락펴락하는 '적폐' 브루노 햄프 장관과 반체제 예술가로 낙인 찍혀 더는 연극 연출을 할 수 없게 된 비운의 예술가 예르스카를 연기한다. 이호철은 승진에 집착하는 비즐러의 상관 그루비츠 국장과 반체제 인사이자 드라이만의 친구인 하우저로 분한다. 장면마다 180도로 달라지는 배우들의 눈빛과 말투·걸음걸이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주역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받고 있다. 윤나무는 비즐러의 변화를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냈다.
연극은 인터미션 없이 110분 동안 이어지며, 전개 속도는 영화(137분)와 비슷하다. 원작의 팬이라면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연극적'으로 표현하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겠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에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중견 배우 손상규의 연출 데뷔작이다. 손 연출이 번역·각색도 맡았다. 원작 영화는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프랑스 세자르상 등의 외국어영화상을 받고, 그해 독일영화상 작품상과 주·조연상 등을 휩쓸었다. 국내에도 팬층이 두터워 최근 17년 만에 재개봉했다. 연극은 내년 1월 19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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