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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데스크에서] 두 할머니의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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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故 홍계향·박춘자 할머니. /사회복지공동모금회·LG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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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향(90) 할머니 취재는 까다로웠다. 과묵한 그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노점상, 가사 도우미, 지하철 청소 등 말로 못할 고생 끝에 얻은 경기도 성남의 7억원짜리 집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이유조차 알기 어려웠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 사흘간 퍼즐 맞추듯 취재를 했다.

홍 할머니와 10년 전부터 만나왔던 모금회 간부들도 “할머니가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 기부를 했다’고 말한 것만 기억난다”고 했다. 과거 모금회 소식지들을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2014년 그의 인터뷰 기사에 기부 이유가 적혀 있었다. “노점상을 할 때 친정 부모처럼 날 아껴준 모란시장 남양종묘집 사장님, 쉬엄쉬엄 하라며 의자를 권했던 액자 공장 사장님, 대합실 바닥 좀 그만 닦으라고 밀대를 뺏던 모란역장님 같은 분들의 인정....”

홍 할머니는 이때를 “깜깜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서울의 채소 가게를 접고 무일푼으로 성남에 온 1983년, 49세의 그를 받아주려는 공장은 없었다. 가까스로 들어간 곳이 액자 공장에서 독성 화학물질로 쇠를 씻는 세척반이었다. 이 공장마저 문을 닫자 그는 노점상, 지하철역 청소 일을 전전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이웃 ‘사장님’과 ‘역장님’이 건넨 위로의 고마움을 31년간 간직한 뒤 2014년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것이다.

홍 할머니 별세 두 달 전인 올 3월, 박춘자(95) 할머니도 영면에 들었다. 그는 남한산성 중턱에서 20년간 김밥, 삼계탕 등을 팔아 번 돈 6억여원을 기부했다. ‘남한산성 할머니’로 언론에 자주 소개됐다. 그가 2008년 어린이재단에 3억여원을 보내며 기부를 시작했을 때, 사회부 초년생이던 기자는 운 좋게 이 얘기를 먼저 전해 듣고 그를 인터뷰하러 갔었다.

그는 남한산성 중턱의 버려진 움막에서 장사를 시작한 1960년 무렵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했다. 이혼한 남편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 둘을 박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가 남한산성에 올랐을 때는 10년간 내 자식처럼 키운 이 아이들마저 “친엄마에게 가겠다”며 떠난 직후였다. “겨울에 미끄러져 이고 가던 식재료를 엎어버렸을 땐 살아서 뭐 하나 싶어 눈물이 났다.”

그런 그에게도 손님은 있었다. 술에 취해 욕설을 하는 손님도 있었지만, “아주머니 삼계탕이 최고다” “맛있게 잘 먹고 갑니다”라는 단골도 생겼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박 할머니는 ‘내가 손맛이 좀 있지’라며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말들이 절망 속 ‘남한산성 할머니’를 지탱한 큰 힘이 됐으리라.

평범한 우리들은 전 재산을 기부하기 어렵다. 소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평범한 우리도 두 할머니 같은 ‘큰 난로’에 불을 붙이는 성냥 한 개비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힘든 이웃에게 공감을 담은 위로 한마디 같은.

[조백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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