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간)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국가 재정 지원과 임금 억제, 지적재산 도용 같은 반(反)경쟁 및 비(非)시장 수단을 사용하는 증거가 있다”라며, 통상법 301조에 따라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 법은 미국에 해가 되는 외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를 제거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조사 대상은 국방·자동차·의료기기·항공우주·통신·전력 등에 쓰이는 범용 레거시(성숙 공정) 반도체와 기판·웨이퍼다.
김주원 기자 |
범용 반도체는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진 않지만, 미사일에서부터 세탁기에까지 두루 쓰이는 ‘산업의 쌀’과 같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이 철강, 선박, 태양광 패널, 전기차 저가 제품을 시장에 쏟아내자 미국과 여러 나라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잃어 문을 닫았고, 중국이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라며 “미국 관료들은 반도체가 그다음 차례가 될 것을 우려한다”라고 보도했다.
이번 조사에 대한 결정권은 내년 1월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갖는다. 불공정 행위가 드러나면 중국산 반도체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거나 수입을 제한할 수 있어, 트럼프 당선인의 ‘중국산 제품 관세 60%’ 공약 실행에 힘을 보태게 된다.
중국 상무부는 이날 “자국 반도체 산업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는 미국의 자기모순”이라며 “중국의 권익을 단호히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보복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런데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위협하는 중국 창신메모리(CXMT) 등의 메모리 덤핑은 미국의 이번 조사 대상에 적시되지 않았다. 앞서 지난 20일 그레고리 앨런 미국 전략문제연구소(CSIS) 와드와니 AI 센터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중국산 첨단·범용 시스템 반도체를 경계하지만, 범용 메모리는 아니다”라며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미국과 미리 협상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이 대만·일본과 함께 미국의 ‘칩4 동맹’ 일원임에도, 한국을 위협하는 ‘중국산 저가 메모리’를 미국에 부각하는 데에 실패한 셈이다.
반도체 생산·매출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맡겼던 한국은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중앙일보에 “트럼프 정부와 중국의 반도체 협상 가능성은 열려 있다”면서도 “협상이 불발돼 미국이 중국산 반도체에 고관세를 매기면,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공장 생산품도 불이익을 받게 된다”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경제성을 따져 중국에 투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칫 회사 전체가 미국의 제재를 당할 우려도 있다는 얘기다.
국내 자체 공급망 확보는 시급해졌다. 권 교수는 “한국 반도체 제조는 여전히 해외 소재·부품·장비 의존도가 높다”라며 “이를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경기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에 한국 기업뿐 아니라 해외 소부장의 생산기지를 유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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