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것은 이런 포악한 행태를 다른 교회들(특히 대형교회)이 방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긴 침묵은 암묵적 동조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들이 숨기는 게 참 많고, 결국 그들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서를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는 목사들을 떠올립니다. 저들은 권력과 야합하고, 교회 개혁을 방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에게 정치색을 끼얹고 그들을 내세워 권력과 명예를 얻습니다. 신도들마저 팔아먹는 셈입니다.
유년 시절 예배당은 누추해도 정갈했습니다. 작아서 그 속에 들면 누구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들은 사연 하나씩 품고 새벽마다 교회에 모였습니다. 사연에는 슬픔이 묻어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고요해서 아침 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들이 돌아가면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주 조용한 눈물방울들. 햇살도 그 눈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순수였습니다. 그 눈물이 세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눈물로 나라와 민족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 기도의 힘이며, 기독교가 일조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예수는 금식할 때면 머리를 빗어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 또한 골방에서 하라고 일렀습니다. 한데 가난한 기도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통성기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함께 울다가 일제히 그칩니다. 목사는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된다고 소리칩니다. 예수가 언제 잘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더럽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번듯한 성전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떡과 포도주 한잔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신도들은 헌금과 통성기도가 쌓였으니 천당이 예약되었다고 믿습니다.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안팎의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정의로움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냈습니다. 환전상들의 책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어버렸습니다. 돈에 오염된 무리를 꾸짖었습니다.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이러한 예수의 의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그래서 복만을 받자고 합니다. 아마도 신도들의 비판의식을 일깨울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의롭게 싸우고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지려 하니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희생은 싫고 저항은 무서울 겁니다. 자연 설교 속에 ‘의로운 저항’이 줄어들고, 대신 부쩍 이적을 내세웁니다. 세속화의 따가운 시선을 신비주의로 희석시키고 있음이지요.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굶주리는 곳에, 불의에 의해 신음하는 곳에 살아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걸으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쁨보다 교회 안에서 느끼는 절망감이 더 커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이 부흥시켰다고 교회를 자식에게 통째 물려주는 사례가 속출합니다. 교단 발전에 공이 크다며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자도 있습니다. 성전을 사유화하고, 자신을 예수 반열에 올리는 목회자들에겐 가난한 이들이 보일 리 없습니다. 그들 마음속엔 이미 거대한 바벨탑이 솟아 있습니다. 성전이 호화로울수록, 제단이 기름질수록, 찬양이 우렁찰수록 가난한 자들이 들어설 공간은 줄어듭니다. 우리 교회 목사가 영과 육에 살이 올라 뒤뚱거리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봐야 합니다. 가난해서 쫓겨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입니다. 주여, 간밤 어디로 임하셨나이까.
김택근 시인 |
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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