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라고 하는 것은, 전체주의 그리고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극우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보수와 극우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김상욱의 한 방송 인터뷰를 보면서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이나 논리가 특별해선 아니다. 톤 앤드 매너라고도 부르는 말하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친위 쿠데타와 탄핵 표결 과정에서 나도 방송과 유튜브를 많이 봤다. 사람들은 화가 많이 났고, 때로는 신랄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문제점을 파고들어갔다. 물론 나도 이런 걸 재밌게 봤다. 입장이 같으면 그런 말들이 속 시원했고, 입장이 다르면 비열하게 느껴졌다. 보수 중에서는 나경원의 말이 특히 좀 이상했다. 민주당원들이 국회를 포위해 국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말은 지난 10년간 들은 것 중에서 가장 이상한 얘기였다. 그렇게 날 서 있거나 어눌한 말들 속에서 김상욱의 차분하면서도 따스한 말이, 정말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말 같았다. 몇번을 다시 봤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국의 보수에도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국민의힘이 그냥 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을 바꾼 노무현의 ‘공터 연설’
내가 생각나는 정치인의 말들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여의도에서 열린 김대중 대선 연설을 본 적이 있다. 마이크가 울려서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할머니들이 모금함에 손가락에 끼었던 금반지를 넣는 것을 본 강렬한 기억이 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화갑의 총선 연설을 들으며 저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내 인생을 바꾼 단 하나의 연설은, 노무현의 공터 동영상이었다. 아무도 없는 부산의 공터에서 혼자 출마 연설을 어색하게 하던 그 동영상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유행시켰다. 그해 나는 노사모에 후원금을 냈고,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했다.
김상욱의 인터뷰 영상을 몇번 더 봤다. 그가 실제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스타일은 한국 정치인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노회찬과도 다르고, 노무현과도 달랐다. 박정희나 전두환 심지어 박근혜와도 전혀 달랐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따뜻함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격동의 시대, 친위 쿠데타와 내란의 역사, 그 속에서 그는 따뜻한 스타일로 말했다. 기차 안에서 순간 국회로 뛰어올 정도로 열정적이고 격동적인 젊은 정치인, 그렇지만 마이크 앞에서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윤석열은 물론이고 이재명 그리고 한동훈에게는 없는 것, 그건 따뜻함이다. 장검처럼 무섭거나, 도끼처럼 둔탁하거나, 베일 듯한 면도날 같은 논리, 이런 게 한국 정치인들의 말이었다.
우리는 지금 정치 양극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선거가 끝나도 일상생활로 돌아가지 못한다. 진영이 다르면 연애는 물론이고, 밥 한 끼 같이 먹기도 어려워졌다. 국회의장은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헌재의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온전한 일상은 어렵다. 그 속에서 김상욱이 살짝 보여준 따뜻함은 어떻게 우리가 윤석열이 던져놓은 난장판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지, 그 단초를 찾게 해주었다. 박근혜와 척을 져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박세일이 한때 ‘따뜻한 보수’를 얘기했다. 공동체가 한국 보수의 주요 가치인 적도 있었다. 그런 괜찮았던 보수들의 시대를 나는 김상욱을 통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증오의 시대’에 필요한 건 따뜻함
김상욱의 인터뷰를 몇번 보고, 내가 쓰는 글들을 돌아보았다. 나도 차가운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보수’들과 논쟁하면서 살아서, 따뜻함은 경제적 모순을 은폐하려는 자본의 눈속임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글, 지금까지 이런 건 재수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윤석열이 만들어놓은 이 증오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조금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현실 정치인으로서 김상욱은 대선은커녕 울산 지역에서 다음번에 공천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확실하게 날 선 인간들이 한국 보수의 권력을 재탈환했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공터 동영상을 보고 내가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한 것처럼, 김상욱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그에게 투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석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트럼프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따뜻함 몇조각이 필요할 것 같다. 따뜻한 대통령, 따뜻한 국무총리, 그런 미래를 소망한다. 우린 더럽게 날 선 시대를 살고 있다.
우석훈 경제학자 |
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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