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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폭력없는 사회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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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야만과 구별되는 문명사회의 본질은 힘의 사용에 대한 통제라고 할 수 있다. 힘은 그 본성상 자의성을 갖는다. 요컨대 그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힘이 '자연적으로' 행사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안정적 질서도 기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쉽게 추론 가능하다. 첫째, 이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인 힘 자체가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배적인 힘은 언제든지 보다 강한 다른 힘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 둘째, 무엇보다도 힘을 가진 자는 언제든 자신의 결정을 변경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바꿀 수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힘의 자의성 테제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 불안정성과 그것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오직 합의된 절차와 규범에 따라, 말하자면 공동체가 정한 '법'에 따라 행위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힘들이 어떤 제한도 없이 표출되고 서로 부딪히던 자연상태는 우리가 근대 이후에 '시민사회' 혹은 '문명사회'라고 부르는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명은 힘이 원리가 되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 즉 '야만'의 극복으로 정립된다. 문명과 야만의 이 대립은 한마디로 힘의 규제적 사용과 자의적 사용, 즉 법과 폭력의 대립이기도 하다.

그런데 법과 폭력을 이렇게 배타적 대립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로부터 출발해보자. 기대와는 달리 문명화된 사회에서 폭력은 줄어드는 대신에 오히려 증폭되고 일반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이르게 한다. 과연 인간사회에서 폭력은 제거 가능한가? 오히려 파시즘 체제들이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최소한의 폭력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야말로 가장 큰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소위 문명사회도 실제로는 폭력에 기초해서 성립된 것은 아닌가?1) 요컨대 법의 토대는 어떤 종류의 폭력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법은 어떻게 폭력과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법의 원초적 토대로서의 폭력

힘의 정당한 사용을 규정하는 법의 토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고전적 답변 방식은 법의 토대를 보편적 이성에서 찾는 것이다. 법은 그것이 법으로서 존재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하는 어떤 근거나 이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근거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고전 철학자들이 주창했던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바람'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하면, 법이 실제로 어떤 보편적이고 합리적 인식에 토대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받아들여져서 법으로서 실효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법은 합리성에 토대하고 있기보다는 합리성을 향한 열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합리성은 법의 토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요청되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법을 실제로 정립하는 것은 무엇인가? 법은 어떤 힘 혹은 권력에 의해서 정립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을 정립하는 이 힘은 법질서에 앞서 행사되는 것이기에 승인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외적 토대나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힘은 개념적으로 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역설이 성립한다. 법은 폭력을 배제하고 그것에 대립하지만 자신은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 데리다(J. Derrida)는 이 역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몽테뉴(M. de Montaigne)와 파스칼(B. Pascal)이 사용하고 있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 속에서 찾는다. 몽테뉴에 따르면, "법은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유효하다. 이것이 법의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다".2) 데리다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에서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법의 설립은 법을 정초하고 정당화하는 수행적 힘(force performative)의 작용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수행성'은 두 가지 함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자신의 타당성을 외적인 어떤 근거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행 자체 속에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법은 그것을 법으로 포고하는 힘의 행사를 통해서 법으로 정립된다. 둘째, 수행성은 사태를 변화시키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 결국, 수행적 힘이란 그 힘의 행사 자체가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사태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몽테뉴와 파스칼이 '신비한'이라고 부른 것의 요체는 여기에 있다. '신비'는 어떤 로고스(logos), 어떤 담론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담론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정당화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법정립의 원초적 순간은, 정당성을 따질 수 있는 전제로서의 어떤 원리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3)

데리다의 이러한 논의는 법의 원리로 제시되는 '정의'(justice)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제 정의는 특정한 윤리-정치적 원리로 규정될 수 없다. 따라서 법은 결코 절대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토대가 수행적 힘인 한에서 법은 재해석되고 재정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법의 이 '해체가능성'(déconstructibilité) 자체를 정의라고 부른다.4)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법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모든 행위는 정의로운가? 데리다가 이 해체가능성을 정의라고 부르기로 한 이상, 거기에는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어떤 정의로운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앞서 제기한 물음을 바타이유(G. Bataille)가 1933년에 발표한 <파시즘의 심리학적 구조>5)를 통해 진전시켜 보자. 이 글은 먼저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동질성(l'homogénéité)은 요소들의 통약성(commensurabilité)과 그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6) 그런데 사회적 차원에서 통약성은 생산체제에 의해서 주어진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사회적 동질성을 정초하는 공통척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동질성은 견고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그 내부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질적 요소들이란 동질적인 체제로 동화할 수 없는 요소들을 말한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동질적인 사회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①이질적인 것은 신비한 힘을 의미하는 마나(mana)와 타부처럼 신성한 것(le sacré)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신성한 것이란, 사회로부터 추방된, 따라서 접촉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실제로, 로마제국에서는 죄를 짓고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사회로부터 배제된 사람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불렀다. ② 이질적인 것은 또한 비생산적 소비의 결과들을 지시한다. 예를 들면, 무의식 혹은 상상적 허구의 귀결들은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③ 이질적인 요소들은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한다. 그것은 매혹일 수도 있고 반감일 수도 있다. ④ 이질적 요소들은 폭력, 과도함(démesure), 정신이상, 광기 등으로 규정된다. ⑤ 동질적인현실은 엄밀한 규정 하에서 그 추상적 측면과 더불어 제시되지만, 이질적인 현실은 거친 힘과 충돌로서 제시된다. ⑥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질적인 것은 완전히 다른 것, 통약가능하지 않은 것이다.7)

바타이유는 이질적인 것의 이러한 특질들로부터, 이질적인 것이 갖는 힘의 표현으로서 두 가지 가능한 양태를 제시한다. 그 첫째는 자신이 이 글에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파시즘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가능성으로서 열어놓고 있는 하층계급의 전복적 혁명이다. 이러한 구분은 앞에서 언급한 '신성함'의 이중적 의미에 상응한다. 즉 전자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신성함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며, 후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제된 자라는 의미에서의 신성함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동질성은 견고하지 못하다. 그것을 견고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은, 그것의 존립 근거를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원리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때 이 외부는 절대적 명령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파시즘은 정확히 이러한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의 신성화에 기초해 있다. 그 이질적인 것은, 강렬한 매혹의 대상이 되며, 그러한 한에서 절대적 복종의 대상이 된다. 파시스트적 지도자는 이러한 기제를 통해서 사회를 통합하고 전체화한다. 요컨대, 파시스트는 사회의 동질성을 확고히 하고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절대화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타이유가 보여주고 있는 흥미로운 점은, 파시즘이 기초해 있는 이질적인 것의 신성화는 파시즘이라는 제한된 형태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주권(souverainté)의 형성 비밀이기도 하며, 모든 종교적 권력의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동질적인 사회가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이질적인 것들을 배제하려는 모든 기제의 일반명사로서 제시된다.

이렇게 동질적 사회의 한 부분이 신성화되고 부동의 근거가 되어 사회를 보다 강력하게 동질화시켜 나갈 때, 그것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바타이유는 또 다른 이질적인 부분, 즉 배제되고 억압받는 하층계급에게서 찾는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등장하고 있던 파시즘 체제들에 대한 반-파시스트적 운동은,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것의 '강렬한'(violent) 힘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파시즘과 하층계급의 반-파시스트적 운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타이유에게 그 차이는 여기에 있다. 둘 모두 이질적인 힘의 표출이지만, 전자는 사회의 동질화를 겨냥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이질성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 차이만으로 충분할까? 이 차이로 둘은 명확히 구별될 수 있는가? 반파시스트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라는 이질적 힘은 어떤 점에서 파시즘과 다르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배제되고 억압받는 계층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히려 이질성을 신성화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닌가?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렇게 대립시키는 것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립이라는 단순 논리로의 회귀가 아닌가?

보편의 정치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데리다를 경유하면서 던졌던 질문, 즉 수행적 힘에 의한 법의 해체와 재구성은 어떤 이해 가능한 의미에서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은 법의 토대를 수행적 힘에서 찾는 데서 온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논제가 법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그 해체가능성을 열어 놓기는 하지만, 이 가능성만으로 정의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따라서 법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정의 개념에는 힘의 수행적 행사로서의 폭력 이외의 다른 요소가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요컨대 어떤 힘의 행사가 정의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이념이나 원리가 매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데리다를 비롯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경계했던 것, 즉 보편주의의 폭력이라는 위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보편주의에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항상 배제와 차별이라는 폭력의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로 발전했던 역사를 통해서 확인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겔(Hegel)을 재해석하면서 프랑스 현대철학자 발리바르(E. Balibar)가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보편적인 것을 벗어나서 무엇을 말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8)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편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주체에 의해 말해지기 때문에 특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역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여러 특수한 보편주의 담론들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보편은 보편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보편성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와 같은 여러 담론들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각각의 보편적 담론들은 지배적인 것이 되기를 욕구하면서 서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에 대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것은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새로운 보편적 담론으로 전화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절대적 보편성이 아니라 여러 보편들의 생성과 전환의 역사, '보편의 변증법'(dialectic of the universal)9)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생성과 변화의 변증법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보편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법의 형태로 제도화되는 보편은 그 토대가 어떤 수행적 힘이 아니라 보편에 대한 한 해석이며, 이 법에 대한 해체도 그 보편의 재해석에 근거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현행 법체계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원리의 한 해석, 즉 그것의 한 특수한 구현태이다. 그리고 이 특수성은 저 보편적 원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통해 해체 가능하다. 이 보편의 변증법은 법(혹은 정의)과 폭력의 관계에 대한 사유에서 요구되는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킨다. 한편으로 그것은 법의 절대화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해체가능성을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편성을 통해 법에 요구되는 정의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후자는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현존하는 법체계를 보존하려는 사람이나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보편적 원리에 주창하고 그것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제한성 또는 강제성이 법을 힘의 자의적 행사로서의 폭력과 구별한다.

프레시안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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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 지라르(R. Girard)는 자신의 책 <폭력과 성스러움>(La violence et le sacré)에서 문명사회는 하나의 희생양에 폭력이 집중됨으로써 성립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 Montaigne, Les Essais, III, chap. XIII, De l'expérience, édition Classiques modernes, La Pochotecque. p. 1669.
3) Cf. J. Derrida, Force de loi. Le "Fondement mystique de l'autorité", Galilée, 1994, p.26-34.
4) 데리다의 책 <법의 힘>은 "해체가 정의다"(op. cit., p. 35)라는 논제로 요약된다.
5) G. Bataille, "La structure psychologique du fascisme", in La Critique sociale, n° 10, Paris, 1933, republié dans Hermès, n° 5-6, 1989, p. 137-160.
6) Ibid., p. 137.
7) Ibid., p. 141-43.
8) Cf. E. Balibar, On Universals: Constructing and Reconstructing Community, trans. by J. D. Jordan, Fordam University Press, 2020, p. 39-58.
9) Ibid., p. 15.

[박기순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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