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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주 120시간 주장한 사람이 대통령 돼”…영국 교수가 파헤친 일 중독의 나라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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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창비 펴냄.


매일경제

[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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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적절한 시간의 정치가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기묘한 징후는, 필요할 경우 사람들이 주당 120시간씩 일하는 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서 나타났다. 그는 심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지난해 3월 기본 40시간에 최대 12시간까지 초과 노동을 허용한 노동시간 체제를 개정해 주당 69시간까지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의 공동 창립자인 정치경제학자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 교수는 최근 출간한 ‘시간 불평등(The Politics of Time)’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 사회의 시간 불평등은 적절한 노동 시간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시간 불평등’은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큰 시간 불평등을 고착시켜온 자본주의의 역사와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쳐 비판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시간은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천천히 술 한 잔을 마시는 일, 사랑하는 사람 옆에 누워 있는 일, 악기를 연주하는 일, 시를 읽거나 시 몇 줄을 써보는 일, 자녀와 함께 공을 차는 일 등 사람 마다 자기 시간을 채우고 싶은 귀중한 일들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좋은 기억들로 시간을 채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충분한 시간의 자유를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밥벌이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만으로는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어렵다.

매일경제

스탠딩 교수는 “슬프게도 우리가 사는 현대의 쾌락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시장 추동 사회에서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시간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시간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정치’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노동 시간을 규제할 수 있는 것도 정치다.

책은 현대사회에서는 일하지 않을 권리, 즉 자유 시간을 가질 권리가 쉽게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한국의 근로자들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보다 연간 39일을 더 노동한다. 대부분의 나라보다 더 많은 사람이 시간의 불평등 속에 살아가는 셈이다. 일부 사람들은 노동 시간을 제한하면 소득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고 주장하지만 단순한 일자리 보장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스탠딩 교수의 생각이다. 즉,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컨대 기본소득처럼 불안정하고 무의미한 일자리에 매달리지 않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스탠딩 교수는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논문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시간 불평등이 해소된 사회의 시나리오를 소설처럼 펼친다. 이를 통해 책은 불투명한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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