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한국지사는 지난달 직원들에게 이런 공지를 전달했다. 가령 직원이 보육원 등에 10만원을 기부하면 회사가 20만원을 더해 총 30만원을 기부하게 되는 것이다. HP는 이런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매달 전사적으로 진행한다. 연중 하루는 업무를 안 해도 되니 자율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라고 지정해 놓은 날도 있다. 그 결과 지난 1년간 한국 내 HP 직원 800여명 중 77%가 자율 봉사활동에 나섰다.
글로벌 IT 기업이 이처럼 유별나게 직원들에게 봉사활동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HP 오피스에서 김혜선 HP코리아 공공정책 및 준법 관리 사업 총괄 전무를 만났다. HP 한국지사에서 지속 가능한 경영 활동을 이끌고 있는 김 전무는 “기술로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기술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간극을 채워가는 건 테크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철학이 창업자 시절부터 쭉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단순히 당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김 전무는 “봉사활동은 회사 사업에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며 “직원들의 애사심을 북돋는가 하면 회사 안에서는 미처 몰라봤던 직원들의 숨은 재능을 발견해 리더로 육성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혜선 HP코리아 공공정책 및 준법관리 사업 총괄 전무./HP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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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핵심은 ‘자발성’이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자발적인 행위가 오히려 자신의 자부심과 사기를 끌어 올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전무는 “직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타인에게 도움이 된 일을 곱씹으며 ‘이런 회사라면 자부심을 느끼며 일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열정을 보인다”며 “회사 밖에서 참여하는 이런 봉사활동으로 오히려 회사에 다닐 맛이 난다고 얘기하는 직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많은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CSR)을 진행하고 있으나, 김 전무는 “수혜자들이 실제로 ‘받고 싶어 하는’ 활동보다 ‘우리 회사가 줄 수 있는’ 활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업이 생각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공헌 사업이 지속되려면 제품을 팔 때처럼 수요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핵심은 수요 기관, 수혜자와 사전에 집중적인 논의를 거쳐 그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후에도 피드백을 받으면서 프로그램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수”라고 말했다. 아래는 김 전무와의 일문일답.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이 기업에 왜 중요한가.
“매일 24시간 중 적어도 30% 이상을 일하며 보내는 직원들 입장에선 외부에 도움을 주는 활동을 통해 일에 대한 가치와 재미,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가진 기술을 학생들이나 어르신들에게 나누며 그야말로 ‘덕업일치(일과 좋아하는 것이 일치)’ 기회를 얻는 것이다. 임직원 대부분은 ‘도움을 주러 갔다가 오히려 내가 배우고 왔다’고 입을 모은다. 평소엔 잊고 살던 내 일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거다.
엔지니어들은 기술 봉사를 하면서 본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제품의 개선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또 각 활동엔 회사 리더들이 ‘스폰서’로 참여하도록 독려해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된다. 이뿐인가. 밖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미처 몰랐던 직원들의 숨은 재능을 발견해 함께 프로젝트를 해보자며 다른 부서에서 러브콜을 보내기도 하고, 회사도 그 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여러 기회를 제시한다. 회사와 직원 모두에게 선순환 구조가 되는 것이다.”
—회사는 임직원들의 참여를 어떻게 독려하나.
“테크 기업의 고유성을 담은 맞춤형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자 노력한다. HP 직원들의 능력을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에 전하는 게 핵심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HP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 등 13~15개 협업 기관과 논의해 수혜자의 필요에 맞게 맞춤화돼 있다. 얼마 전엔 이런 사례도 있었다. HP 임직원 자녀 중 특성화고 재학생이 있으면 그곳 학생들을 회사로 초청해 현장 실습 기회를 제공하는데, 실제로 한 임직원 자녀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판교 R&D(연구개발)센터에서 직접 아들과 아들 친구들 앞에 나와 멘토링 교육을 진행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명확히 알았을 거다. 이런 경험을 하면 아버지도 아들도 얼마나 뿌듯하겠나. 회사 입장에서도 분명한 선순환이다.”
국내 HP 임직원들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코딩 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HP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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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자율이 맞는 건가. 강제가 아닌데도 직원들의 참여율이 높은 비결은 뭔가.
“사회공헌 활동을 고과에 넣는다거나 강제로 진행한다면 임직원 참여율이 100%였을 거다. 그런데 77%이지 않나(하하). 작년 회계연도 기준 총봉사 시간은 2850여 시간으로, 1인당 약 4시간 수준이다. 이 모든 활동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건 기업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본다. 애초에 회사가 출퇴근 시간을 체크하지 않고 직원들을 신뢰하는 문화가 바탕이 돼 있으니 봉사활동도 각자 선택에 맡기는 거다. 업무를 공식적으로 빼주는 ‘봉사활동의 날’이 있지만 그날 봉사활동을 안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활동을 서로 인정해 주는 문화가 전사적으로 자리 잡았다. 가령 팀 리더가 나서서 ‘A님, 이번 주 이런 멋진 봉사를 하셨네요, 다음엔 저도 꼭 참여하겠습니다’라고 게시판 등에 알리는가 하면 미국에 있는 동료가 ‘너희 이번에 초등학교 코딩 교육했다며, 대단하다. 우리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려줘’라고 묻는 등 ‘칭찬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더 많은 직원이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기업이 CSR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
“기업 영업 활동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건 ‘수요자 중심 사고’다. ‘이게 정말 필요한 프로그램인가’ 자문해 보는 거다. 이를 위해선 수혜자들의 피드백을 꼼꼼히 체크하는 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는 온라인 봉사 교육을 제공했는데, 정작 수혜 학생들이나 수혜 기관은 현장 실습을 원했다면 얼른 프로그램을 바꿔야 한다.
학생 대상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기업은 한 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HP 임직원들은 아동 보호 정책에 대한 교육을 받고,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과 태도로 교육할 것인지 선언서를 써낸다. 회사는 참여 임직원들의 성범죄 이력도 조회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학습자에 맞춘 활동이 돼야 프로그램이 성장할 수 있다.”
최지희 기자(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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