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얼굴 없는 천사' 올해는 8000만원... 25년간 10억 기부

20일 A4상자에 8003만원 두고 가
이름·직업 알리지 않고 매년 기부
2000년부터 총 10억4483만 원

전주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0일 오전 얼굴 없는 천사가 놔두고 간 기부금을 확인하고 있다. 전주시 제공

매년 연말이면 전북 전주 노송동에 이름도 얼굴도 노출하지 않고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다녀갔다. 벌써 25년째다. 그동안 남몰래 기부한 금액이 10억 원을 넘어선다.

20일 전주시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26분쯤 노송동 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본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기자촌 한식뷔페 맞은편 탑차 아래 놓았으니,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받았던 주민센터 직원은 매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찾아오는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임을 직감했다.

곧바로 중년 남성이 지목한 장소에 주민센터 직원들이 가봤더니 A4용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5만 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들어있는 돼지저금통 한 개가 있었다. 직원들이 금액을 확인해보니 총 8,003만8,850원. 천사는 A4용지에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따뜻한 한 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시지도 남겼다. 이로써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얼굴 없는 천사가 보내 준 성금은 총 10억4,483만6,520원에 달한다고 전주시 측은 설명했다.

얼굴 없는 천사가 놔두고 간 상자.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 2000년 4월 한 초등학생을 통해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옛 중노2동 주민센터에 보낸 뒤 사라지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그해부터 매년 성탄절 전후로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2019년에는 주민센터 인근에 놓고 간 6,000여만 원의 성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천사의 선행은 멈추지 않았다.

전주시는 그간 얼굴 없는 천사가 베푼 성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지역주민 6,937세대에 현금과 연탄·쌀 등을 전달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지역인재에게 장학금 및 대학 등록금도 수여했다.

노송동 주민들은 이러한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천사(1004)가 연상되는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하고, 불우이웃 돕기와 나눔 행사를 연다. 또 매월 4일을 ‘얼굴 없는 천사의 날’로 정하고, 지역 노인에게 중식 제공과 이·미용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가 돈 상자를 놔두고 간 장소.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 첫 제정된 HD현대아너상의 ‘대상’과 ‘1%나눔상’의 수상자로 결정됐다. 시상금 2억 원은 전주시에 전달돼 ‘얼굴 없는 천사’가 평소 밝혀온 뜻에 따라 소외계층을 돕는 일에 사용된다. 채월선 노송동장은 “2000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큰 사랑과 감동을 선사한 얼굴 없는 천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전주= 박경우 기자 gwpar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