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소년인권운동 단체 ‘아수나로’와 ‘지음’이 5만명 가까운 청소년이 연명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정봉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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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o 여고 재학생 ㄱ에게 지난 14일은 기쁨과 분노가 교차한 날이었다. 12·3 내란 사태 이후 “목소리를 보태고 싶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해 온 까닭이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단 소식에 환호했다. 그러나 몇 분 뒤 같은 학교 학생 273명이 뜻을 모은 시국선언문이 에스엔에스(SNS)에서 지워졌단 소식을 접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와 맞지 않고”, 7일 국회 본회의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국회의원 105명에 대해선 “국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좇은 것”이라고 비판한 내용이었다. 시국선언문이 사라진 배경에는 정치 관여 행위(공직선거 참여 제외) 등을 한 학생에게 최대 퇴학 처분까지 할 수 있다는 학생생활규정(학교규칙)이 있었다.
이에 ㄱ을 비롯한 이 학교 재학생 30명은 지난 17일 학교 교무실에 ‘침묵하지 않겠다라는 학생들의 선언을 삭제한 학교에 요구합니다’란 제목의 항의문을 팩스로 보냈다. 이들은 항의문에서 “주권자이자 학생으로서 모은 우리의 목소리에는 ‘정치 관여 행위’라는 잣대로 잴 수 없는, 존중받아 마땅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구성원들에게 동의 여부를 물으며 충분히 신중하게 민주적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국선언문 삭제를 요구한 학교에 항의하며, 삭제 조치의 철회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서울 o 여고의 학생생활규정 내용. 자료 화면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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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학생생활규정 제1장 제2조에 따르면 (학교가 언급한 규정은) 대한민국 헌법과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교육기본법, 초·중등교육법,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에 근거한다. (하지만) 헌법이 학생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느냐”며 “정말로 학생을 위한다면 정당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학교생활규정을 즉시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전했다. “학교에서 단순히 대입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나는 지성을 가진 지식인이 되고나,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구성원이 되고자,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한 명의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고자, 또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고자 학교에 배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나은 우리가 되고자 용기를 낸 학생들을 응원해 주십시오.”
학생들의 항의문이 전달된 날 이 학교 학교장은 교내 방송을 통해 ‘시국선언 활동에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이 교칙을 빌미로 불이익을 주라고 할 수 있어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한 조치이며 시국선언으로 징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학생들에게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해당 고등학교에 대한 감사 차원의 장학 지도를 하고, 학칙을 바꾸도록 컨설팅(현장 지도)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시교육청은 학생의 정치 참여를 막는 학교규칙은 법 위반이라는 입장이다.
논문 ‘청소년의 정치 참여 확대에 따른 학교생활인권규정의 방향과 과제(2022년)’에 제시된 학교생활규정의 정치적 권리 보장 여부 체크리스트. 논문 내용 갈무리 |
이번 논란을 계기로 학생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거나 이를 빌미로 징계를 가능토록 하는 학생생활규정에 대한 전수조사와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0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권·피선거권 연령이 18살로 낮아졌고, 2022년 정치관계법 개정으로 16살부터 정당에 가입할 수 있다. 해당 연령대가 대다수 학생 신분이라는 점에서 정치 활동과 참여권 보장에 대한 요구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으나 여전히 시대착오적 규정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중·고교 4732곳 가운데 538곳(10%)을 표본 조사해 지난해 말 발표한 ‘학생인권 보장 위한 학교규칙 실태조사’를 보면 중학교 68곳(23.7%), 고등학교 40곳(19.9%)에서 학생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발견됐다.
고교생 ㄱ에게, 이번 사태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됐다. 이런 내용의 학생생활규정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교칙을 몰랐던 게 부끄러웠고, 알았다면 진작 없애려고 했을 거예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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