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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거리에 피어난, 여기 꺾을 수 없는 꽃들이 있다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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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음악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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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비상계엄?”



동료가 문자를 보냈다. 유난히 삐걱거렸던 하루에 가짜뉴스까지. 짜증이 확 났다. 하지만 곧 쏟아지는 문자들. 내용은 똑같았다. 누구는 물음표를 붙이고, 누구는 느낌표를 달았을 뿐이다. 니네 대통령, 얼굴이 불콰하니 술 세게 먹었나 보더라. 나보다 먼저 계엄 선언의 장면을 본 친구가 한마디 더 보탰다. 열렬한 지한파라고 했던 친구다. 수십년 동안 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는 저 농담 같은 한마디에 순식간 무너졌다. 이미 비비시(BBC) 화면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헬기를 타고 국회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때 한국의 대척점에 있는 칠레를 생각했다. 작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에 계엄을 기록했다. 계엄이 오면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고 적었다. 그녀가 노벨상을 받으러 가려는 길에 계엄이 다시 왔다.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에 뜨거운 사랑의 기록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너도나도 그의 시를 읽었다. 곧 칠레에 계엄이 왔고, 그의 집에 군인이 몰려왔다. 그는 더 이상 기록하지 못하고 독살되었다. 계엄은 인간이 아프게 기억하고 뜨겁게 사랑한다고 착각할 때 예고 없이 찾아오는가 보다.



계엄이란 말부터 틀렸다. 군대 통치라는 살벌한 현실을 ‘엄히 경계한다’로 애매하게 표현한다. 계엄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다. 총을 겨누고 하는 말. 네가 잘되길 바란다며 제 아이를 두들겨 패는 패악질의 아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언어가 그 뜻을 상실한다. 그중에서도 ‘국민’은 가장 오염된 언어다.



하지만 계엄은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는 것이 아니다. 탄탄하게 다져 올린 담벼락의 미세한 틈 하나에서 밀고 올라와 독기를 세우는 덩굴옻나무처럼, 계엄은 민주주의 안으로 갈라진 금 사이에서 나온다. 퇴락의 징조는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쉽게 방심한다. 안팎으로 방어막을 세우고 시스템을 정교하게 한다고 늘 요란스럽지만, 역사는 분명하지 않나. 민주주의는 그 견고하다는 벽 안에서 무너진다. 2차대전 이후 나치즘을 원천봉쇄하려고 고통스럽게 키운 독일의 민주주의는 지금 다시 나치즘과 마주하고 있다. 40여년 만에 계엄이 한국에 다시 찾아왔을 때, 이를 반긴 사람들은 계엄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학살, 고문, 강제진압으로 고단한 삶을 연명해 갔던 사람도 있다. 이런 이들이 이제 국무위원이 되어 묻는다. 불법한 계엄을 한 “대통령이 탄핵되면 국민에 무슨 유익함이 있나?” 계엄의 기억은 몸속에 남아 끊임없이 변주되어 살아온다.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가치, 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정치란 사회적 해법을 찾는 과정이지만 이 숭고한 과정이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슬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의 대표’라는 환상과 늘 싸워야 한다. 동종교배는 열등한 자손을 낳다는 생물학적 원리가 인간의 정치계에서 간단히 무시된다. 무한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의 직종은 손에 꼽힌다. 온통 법률가다. 나랏일이 대부분 법을 통해야 하니 그러려니 하겠으나, 그 법은 점점 그들이 대표하는 ‘국민’이 아니라 당사자를 향하고 있다. 그러니 법으로 난리법석이다. 서로 날카롭게 찔러댄다. 대통령도 법의 이름으로 계엄을 하고, 정당도 법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저항한다. 게다가 서로 알고, 더러는 같은 뿌리다. 서로 고발하고, 기소하고 판결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저항’하는 사람도 같은 무리다. 오늘날 가장 처절하게 저항할 수 있는 그룹은 의사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민주주의는 점점 포획되어 간다.



포획된 민주주의는 배불리 먹여주진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정치가 골목가게, 공장, 배달 오토바이에서 멀어진다.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모아서 사람들을 지원하고 투자할 것인지 궁리를 하지 않고, 다시 ‘법적’인 것으로 돌아간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펜으로 문장 바꾸면서 ‘민생’을 돌보려 한다. 이번 계엄은 주식시장과 환율시장을 무너뜨리고, 가게들이 줄지어 선 골목을 텅텅 비게 했다. 민주주의가 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줄 거라는 기대는 접었더라도, 가뜩이나 가벼워진 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계엄은 국회 앞에서 실패했고, 시장과 골목 입구에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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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12월 오전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12·3 비상계엄 관련 엄정한 헌재 판결과 특검 촉구 기자회견’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정택수 부동산국책사업감시팀 팀장, 김성달 사무총장, 박경준 정책위원장(변호사),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휘원 정치입법팀 팀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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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한 민주주의 정치는 공동의 답을 찾지 못한다. 날을 세워 대립하면서도 ‘국민’의 마음을 다져 해법을 찾지 못한다. 답을 내어야 할 때 답을 내지 못하면, 정치는 길거리를 쳐다본다. 너도나도 다시 ‘국민의 뜻’을 찾는다. 그래서 ‘국민’은 억울할 만큼 바쁘다. 해결책을 찾으라고 대표를 뽑아 보내고, 동시에 해결사 노릇도 해야 한다. 알뜰히 챙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도 저녁에는 따로 가르쳐야 하는 부모 같다. 아이들은 그래도 당당하다.



그래서, “국민은 위대하다”는 말, 정치인들이 할 말은 아니다. 국회가 탄핵하던 날, 길거리로 또다른 호소가 쏟아졌다. “이제 시작입니다. 끝까지 싸웁시다.” 당연히 싸울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국회에서 할 말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또다른 싸움의 호소가 아니라 그들의 싸움의 다짐이다. 국회의장의 마지막 말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국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의 연말이 조금 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취소했던 송년회, 하십시오.” 더 이상 국민을 길거리에서 찾지 말고, 살가운 삶의 언덕으로 돌려보내야 된다.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은 그때야 제 뜻을 회복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거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광화문 앞에, 여의대로 위에 있다. 성숙하기 전에 퇴락한 민주주의를 가진 이들의 팔자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밉다고 저 귀한 것을 어찌 갖다 버리겠는가.



촛불을 든다는 것은 사람을 이어서 횃불을 만들자는 것이다. 주황색 불빛 하나를 만드는 일이다. 이번에는 응원봉으로 제각각이었다. 제 빛깔과 제 모양으로 제각각 흔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빛을 가지고 나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킨단다. 바람이 낮게 와서 사방 천지에 피어 흔들리는 들판의 봄꽃 같았다. 팔자는 사납지만, 눈물나게 아름답다. 네루다는 “꽃을 모두 꺾을 수는 있을지언정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몰랐나 보다. 세상에는 도무지 꺾을 수 없는 꽃들이 있다는 것을. 그 꽃들이 여기에 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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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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