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4시 서울 마고카페에서 열린 동학학당 북콘서트에서 정선원 박사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학학당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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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총탄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죽음과 주검을 넘어 앞으로 나아갔다. 충남 공주 일대 꽁꽁 언 땅은 핏빛으로 덮였다. 그들은 왜 죽음을 각오하고 우금티를 넘으려고 했을까? 우금고개나 우금티로 불렀던 그 고개만 넘으면 충청감영(현 공주사대부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반외세 기치를 내건 농민군은 금강을 건너 한성으로 가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공주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최대 격전지였다.
공주 동학현장 찾아 구전 채록하다
최대 격전지 ‘공주전투’ 20년간 연구
지도로 22일간 공방 상황 정리하고
전모 규명한 ‘…공주전투 연구’ 출간
17일 오후 4시 서울 마고카페에서 열린 동학학당 북콘서트는 최근 정선원(64·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이사) 박사가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라는 책을 낸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책은 2023년 그의 원광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연구’(지도교수 조성환)를 보완한 것이다. 정 박사는 “지금도 우금티에 가면 농민군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며 “공주전투 선행 연구와 자료를 검토한 뒤, 현장 답사와 구전 자료를 통해 실태를 보완했다”고 밝혔다.
17일 오후 서울 마고카페에서 열린 정선원 박사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정경미 참배움터 대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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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상황을 연구한 그는 ‘공주 사람’이 아니다. 전남 여수 출신인 그는 1979년 공주사대(현 국립공주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됐고, 두차례 옥고를 치렀다.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뒤 2001년부터 중학교 사회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몇년 전 퇴직했다. 지역운동을 하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공주 동학 현장을 찾아 구전을 채록했다. 정 박사는 “신동엽 시인의 친구인 구상회(1930~2010) 선생께서 이미 구술 조사를 많이 해놓으셔서 그 분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학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93년 출범한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사, 이사장을 지냈다. 공주전투를 연구하던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를 만나 동학 구술 자료를 건넸던 그는 박 교수가 2005년 ‘육성으로 듣는 공주와 우금티의 동학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낸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모시는 사람들)의 공저자가 됐다. 정 박사는 “이후 박 교수님의 권유로 공주전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공주는 1880년 초부터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포교해 1891년에는 동학 포교의 중심지였다. 동학을 창시한 뒤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죄명을 벗기고 원을 풀어주고자 일으킨 교조신원운동도 공주에서 시작됐다. 동학농민혁명의 결정적 공간이었지만, 공주전투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정 박사는 구술 채록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한국과 일본의 문헌 자료를 검토해 공주전투의 전모를 규명했다.
정선원 박사가 지도에 표시한 1894년 공주전투 당시 농민군들의 공격 거점. 정선원 박사 제공 |
동학농민군은 2대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면서 연합군을 형성했다. 전봉준 부대(남접)와 동학교단 쪽 북접(지휘자 손병희)은 그해 10월 논산에서 합류했다. 공주창의소 의병장 이유상 부대, 정산 김기창 농민군, 공주 접주 장준환 세력, 유성의 최명기·강채서·박화춘의 농민군 세력 등 ‘지역 농민군’의 가세가 특징적이다. 공주전투엔 일본군 최대 150여명과 조선군 800여명이 공주전투에 투입됐다. 일본군은 400m 거리에서 조준 사격이 가능한 영국제 신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농민군들은 화승총과 죽창, 활이 전부였다.
‘혈흔천’ 구전될 정도로 희생 컸지만
농민군 조직적 대응에 일본 침략 지체
“‘패배한 전투’라는 관점 재검토해야”
정 박사는 10월22일부터 11월14일까지 22일간 공주전투를 지도로 표기해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18일간으로 알려진 전투 기간이 22일간이었다는 점도 찾아냈다. 공주전투는 1차 대치(10월22일)에 이어 1차 전투(10월23~25일)가 벌어졌다. 11일간의 2차 대치(10월26일~11월7일)에 이어 2차 전투(11월8일~9일)로 공방을 펼쳤디. 특히 11월9일 우금티 송장배미 산자락, 오실마을 산자락, 효포 등 4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을 주목할만하다. 정 박사는 “3차 대치(11월10일~14일) 마지막 날인 11월14일 저녁 농민군이 밀리면서 전선이 공주 대 논산으로 바뀌어 공주전투가 종결됐다”고 했다.
충남 공주시 웅진동 곰내 어귀에 농민군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송장배미’ 조형물. 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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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의 희생은 컸다. 11월9일 우금티에선 ‘40~50차례 연속하여 공격을 감행했으나, 농민군의 시체가 가득했다’, “송장배미 산자락엔 육박혈전 10여차례로 피가 내를 이뤘고, 봉정동 일대는 3년을 두고 주검을 치웠다. 효포 개천은 농민군의 피로 적셔진 혈흔천(血痕川)으로 불렸다”는 구전이 전해져왔다. 정 박사는 “공주는 제국주의 일본이 제노사이드(특정 집단의 멸종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육 행위) 군사작전을 실행했던 현장”이라고 지적했다.
공주전투는 일본의 침략을 지체시킨 ‘전쟁’이었다. 농민군 진압 전담부대인 일본군 후비19대대의 전체 90일 일정에서 ‘서로(西路) 분진대’는 22일 동안 공주에서 저지당했다. 정 박사는 “공주전투 농민군들은 청주로 진격한 김개남 농민군과 연합해 재공격을 모색하는 등 조직적으로 대응했다”며 “공주전투를 ‘패배한 전투’로, 동학농민혁명을 ‘좌절된 혁명’으로 보았던 종래의 관점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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