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식 사회부장 |
이 나라에선 권력자만 안 읽는 게 헌법이다. 대신 국민이 헌법·계엄법 공부하느라 바빴던 2주다. 그날 가족과 TV를 보던 중 속보로 접하거나 쏟아진 SNS 문자 알림으로 선잠을 깬 이도 많았다. 연말연시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린 게 윤석열 대통령의 심야 계엄 선포였다. 처음엔 대부분이 ‘가짜뉴스’라며 믿지 못했지만 이내 직접 한 생방송 발표임을 확인한 뒤 시민들은 헌법부터 찾았다.
헌법 77조 계엄선포권 조항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로 시작한다. 그중 5항이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는 해제 조항이다.
■
국민, 헌법·계엄법 공부 바빴던 2주
계엄군 총구 생방송 카메라 정조준
한덕수 대행 ‘내란 특검’ 수용해야
국회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 뒤 집회를 열어 계엄 해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헌법상 권능이 부여된 유일한 기관이며, 대통령은 지체 없이 이를 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 국회의원은 계엄 중에도 불체포특권으로 보호받는다(계엄법 11·13조). 헌법·법률은 물론 야당 의원만 192명인 정치 현실에서 이성적으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계엄령 선포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밤에 시민 4000명이 서울 여의도 국회로 달려갔다. 국회 집회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위법한 ‘계엄사 포고령 1호’로부터 헌법질서와 국회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국회에 헬기로 공수부대를 투입해 표결을 하려는 의원들을 본회의장에서 끌어내 체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날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실 유리창을 깨고 국회 본관으로 침입한 공수부대원들이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로 진입하기 위해 복도를 뛰던 모습은 국민에게 가해진 폭력과 위협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K1 기관단총, K2 소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야간 조준 장비인 ‘도트 사이트’로 방송 카메라를 향해 광선을 쏘아대며 정조준하는 모습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다.
그렇게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의 불시 위협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할 국군 핵심 전력인 특전사·수방사·방첩사·정보사 병력 1600여 명을 움직였다. 그렇게 강조해 오던 혈맹 미국에는 아무런 통보조차 하지 않고서다.
그날 “국회를 장악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쓸어버리겠다”던 윤석열 대통령조차 9일 만인 12일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 “거대 야당에 경고한 것”이라고 꼬리를 내렸다.
권력자가 계엄을 빌려 국민에게 직접 총부리를 겨눈 일은 45년 만이다. ‘반국가 세력 척결’ ‘자유민주질서 수호’ 같은 계엄 명분은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그날 밤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가 불법 계엄 해제를 의결한 190명의 의원, 생중계로 지켜보며 응원한 국민, 위헌·불법적 명령에 불복한 병사들이 천만다행히도 학살과 유혈 사태를 막은 것이다.
남은 과제는 윤 대통령의 국민을 향한 내란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는 누구도 군을 동원해 국민이 헌법기관에 위임한 주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찬탈하려는 시도를 꿈도 꾸지 못하고 민주 헌법을 지킬 수 있도록 재발 방지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 그 첫 단추가 한덕수 권한대행이 지난 12일 국회를 통과한 내란 행위 진상규명 특별검사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즉시 공포하는 일이다.
윤 대통령은 2022년 3·9 대선 이튿날 당선 일성으로 “오직 국민만 믿고 국민을 받들겠다”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고 통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 윤 대통령이 바뀐 신호는 그 직후부터 나왔다.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을 위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겠다”는 대선 1호 공약이 대통령직인수위에서 바꾼 것이다. 당시 정부서울청사 이전을 백지화하고 벙커가 있는 용산 국방부로 바꾸는 결정을 주도한 사람이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다. 이게 출발점이다.
정효식 사회부장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