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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 (화)

[기자칼럼]0시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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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는 독특한 추리소설이다. ‘0시’는 사건 발생 시점을 상징하는 말인데, 소설 중반까지도 사건은 터지지 않는다. 시작하자마자 살인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 일반적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0시’가 모습을 확 드러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변호사 트레브스는 예견하듯 말한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0시’ 같은 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비록 2시간 남짓이었지만, 진짜 비상계엄 치하에서 날것의 공포를 느꼈다. 물론 현실은 추리소설이 아니고, 용의자는 공공연히 텔레비전에 등장해 범행을 털어놨다. 그러나 이후 이 모든 원인이 음주나 성격 문제 같은 윤석열 개인 차원으로 조명되는 것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그 ‘0시’가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나.

“탐정 소설이란 대개 잘못되어 있어! 살인에서 시작을 한다고. 하지만 살인은 그 결말일세. 이야기는 훨씬 전부터 시작되네.” 트레브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데이터저널리즘팀은 대통령의 ‘격노’ 전화 한 통에 모든 수사가 뒤집힌 해병대원 순직 사건, 정치 브로커에게 대통령 부부가 휘둘린 ‘명태균 게이트’ 등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굵직한 인터랙티브 뉴스를 제작했지만 소소한(?) 일도 많았다. 국정농단 주범들을 사면했고, 의료체계를 붕괴시켰으며, 연구·개발 예산을 대거 삭감했다.

대통령이 된 후 변한 게 아니다. 일곱 글자의 장난 같은 공약으로 혐오를 조장하고, 손바닥에 ‘王(왕)’자를 적은 채 TV토론에 나섰으며, 유세 기차인 ‘윤석열차’를 타서는 건너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놨다. 커플티를 입고 유세를 돌았던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몰랐을까. ‘원조 윤핵관’ 권성동 원내대표를 비롯해 반성은커녕 탄핵 찬성 의원을 색출하자고 나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어떤가. 만화 ‘윤석열차’를 그린 어린 학생조차 예상한 미래였다.

계엄 관련 수사가 진행되면서 드러난 윤석열은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계획은 치밀했고, 직접 군 출동 상황을 챙기면서 다그칠 정도로 ‘광기’에 차 있었다. 가까이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고 각자 밥그릇만 챙겼다는 사실이 무섭기까지 하다. ‘0시’에 터진 둑보다는, ‘0시’를 향해 흘러간 수많은 물줄기가 중요하다.

소설 속 배틀 총경은 범죄자의 ‘광기’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기란, 보통 강박 관념의 문제입니다. 한 가지 생각이 서서히 정신을 왜곡시키는 것이죠.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람들이, 자기는 항상 박해를 받아왔으며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단점을 찾아내지 못해 안달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연민을 호소합니다.”

당장 윤 대통령이 떠오른다. 그 ‘광기’는 주변의 묵인 혹은 지지 속에 싹을 틔웠다. 그저 내 편이 지면 ‘억장이 무너질’ 뿐인 팬덤 정치, 선거부정까지 들이켜야 패배가 납득되는 음모론 정치 속에서 싹은 거목으로 자라났다. 음모론에 빠진 대통령을, 음모론으로 공격하는 이들을 보며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번뜩이는 ‘광기’를 본다.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의 힘은 탄핵 이후 더 절실하다.

경향신문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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