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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연재] 지구인들은 왜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에 매료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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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아시아투데이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지구인의 역사를 탐구하는 외계인 미도가 내게 물었다. "역사책을 쓸 때 왜 지구인들은 특정한 인물을 역사의 중심에 놓는 서술 방법을 그리도 자주 사용하나요? 큰 폭풍이 때론 강줄기를 틀듯 위대한 인물의 출현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진정 생각하시나요? 왜 지구인들의 역사책은 온통 이러저러한 인물의 이러저러한 행적을 그리도 집중적으로 조명해야만 하나요?"

◇ 영웅 중심의 역사 서술, 과연 설득력이 있나?

역사가들은 익명의 다수 군중을 비집고 나와서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시대의 영웅에 광적인 흥미와 집착을 보여왔다. 지구인 한 명 한 명의 삶이 다 유의미하고, 인간은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인데, 역사가들은 왜 특정 인물들에 그토록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가? 영웅 사관에 빠진 역사가가 과연 지구인의 역사를 제대로 그릴 수 있는가? 미도가 그렇게 힐난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국가 출현 이후 문명사를 기술할 때는 위대한 제세(濟世) 영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 듯하다. 인류가 조직한 정치적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때론 한 명의 결정이 수십만, 수천만, 심지어는 수십억 명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놀라운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생각과 판단이 절대다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바로 '권력 집중'이라 한다.

국가의 출현은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한 국가의 관료제는 피라미드 모양의 권력구조를 취하기 때문이다. 상명하달의 명령체계야말로 국가 조직의 기본 원리다. 국가는 권력 집중과 명령체계를 갖추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권력자가 내리는 결정은 실제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역사에서 영웅의 역할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 함무라비가 영웅인 까닭은?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5㎞ 거리에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소포타미아 고도(古都) 힐라(Hillah)가 있다. 강줄기가 도심을 지나 모래바람을 막는 울창한 수림이 조성돼 있는 이 지역엔 지금부터 3800여 년 전 바빌론이란 도시국가가 존재했다. 바로 그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함무라비(재위 기원전 1792~1750)는 페르시아만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400㎞나 펼쳐진 거대한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를 건설하여, 150여 년간 이어지는 기틀을 닦았다.

영토국가의 출현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이집트, 인도, 중국 등 인류 고대사의 4대 하곡 문명에도 침략전쟁과 지역적 병합의 과정을 거쳐서 큰 규모의 영토국가가 등장했다. 지구인의 역사에서 영토국가의 형성은 제국(帝國, empire) 출현의 전단계였다. 함무라비가 오늘날도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변화의 추이를 정확하게 읽고서 여러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통합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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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92-1750년경으로 추정되는 함무라비 대왕의 석회석 부조. 대영박물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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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발전사를 보면, 여러 농촌 마을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도시국가들이 나름의 세력균형을 이루고서 평화·공존하기도 했음이 관찰된다. 교통 발달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던 때라 여러 지역에 정착한 다양한 집단들이 한 도시에 오래 정착하며 독특한 지방문화와 지방민의 정체성을 갖고서 살아갔지만,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고 지역적 교류가 잦아지면서 경제적 통합 정도가 높아졌다. 도시국가들이 제각기 다른 군주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지역적 상호교류가 활발해지면 당연히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지역에 군웅이 할거하는 정치 구조는 지역 간 경제적 통합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함무라비는 지역의 맹주들을 복속시키고 여러 지역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하면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개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스스로 역사의 정도를 간다는 정치적 확신이 군사적 정벌의 의지로 표출되었고 결국 그는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에 장기적 평화와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 함무라비가 영웅이 된 까닭은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하나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 대중을 규합하는 경제 정책

함무라비는 과연 어떻게 군사적 정벌과 통일 전쟁의 필요성을 정당화했을까? 그의 논리가 정복 전쟁을 벌이기 전 그가 바빌론에서 실시한 경제 정책 속에 담겨 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함무라비는 정복 전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바빌론 백성의 민생을 윤택하게 하는 여러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중에서 특히 왕실 재정을 풀어서 부채를 탕감해 주는 미샤룸(misharum, 칙령)을 반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시 국법은 은화의 이자율은 20%, 곡물의 이자율은 33.33%를 상한선으로 정해 놓았는데, 많은 평민이 고리의 이자에 시달리다가 결국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함무라비가 빈민을 구제할 때는 세금을 탕감해 주거나 국고로 상환을 해주어서 빚쟁이나 부자들에겐 큰 손실이 없었다고 한다. 보통 왕들은 통치 기간 내내 한 번 정도 그러한 칙령을 내리기도 어려웠지만, 함무라비는 세 번이나 미샤룸을 반포했다. 게다가 그는 기존의 운하를 정비하고 새 물길을 건설하여 농민들에게 풍부한 수자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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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재건된 바빌론의 폐허 유적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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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정책은 모두 왕실 재정에 큰 압박이 되었지만, 큰 은택을 입은 백성들은 국가에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 바빌론에서 최고의 경세(經世) 능력을 발휘한 함무라비는 왜 정복 전쟁을 개시했을까? 그처럼 적극적으로 제세 정책을 펼치기 위해선 왕실 재정의 확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면 그만큼 세수가 늘어나고 왕실 재정이 튼튼해지면 그만큼 사회적 통합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국가의 목적은 정의의 실현

여러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통합을 지속하기 위해선 당연히 공동의 규약과 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함무라비는 통일 정부의 유지를 위해선 법적·제도적·규범적 일관성을 필요하다는 점도 냉철하게 꿰뚫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략전쟁에 성공하여 대규모 영토국가를 창건한 후에 여러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습적 차별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법전을 제정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2.5m 높이의 돌기둥이 우뚝 서 있다. 함무라비 법전엔 절도, 살인, 배임 등 중범죄뿐 아니라 복잡다단한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민사 관련 항목까지 거의 300조에 달하는 법률이 명기돼 있다. 이 법전을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바로 정의다. 예나 지금이나 법적 정의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다. 법적 정의가 실종된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듯하다.

미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함무라비라는 인물이 중시되는 이유를 다시금 살펴본다. 그는 대내적으로 부자와 빈민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적극적 경제 정책으로 사회적 수혜층을 늘이고, 대외적으로 정벌 전쟁을 통한 지역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불필요한 군비 경쟁을 최소화했으며, 전 지역을 아우르는 보편적 법질서를 확립했다. 함무라비의 통치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를 거쳐 제국으로 나아가는 인류사의 진행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바로 그 점에서 함무라비는 오늘날도 지구인의 역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그가 그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계속>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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