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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중앙시평] 정국 혼란해도 ‘소’는 키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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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12월 정국이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지난 3일 밤 느닷없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정국 혼란은 매일 반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제만 해도 윤 대통령이 계엄 결정을 변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탄핵을 당론으로 반대하였던 여당에서는 한동훈 대표가 탄핵 찬성 입장을 밝혔다. 또한 조국 의원이 대법원 확정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사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일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표결 후 정국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 때문에 일반 국민들의 민생과 국가 경제가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상계엄 후폭풍이 온 나라 덮쳐

반도체법 등 시급 민생 현안 표류

공동체 위한 물적 기반 마련 엄중

정치인의 염치와 타협 정신 중요

대표적인 예로 반도체 특별법과 인공지능(AI) 기본법을 들 수 있다. 이들 법안은 향후 우리나라 경제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라 하루빨리 처리되어야 하는데, 정치 일정에 휘말려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번 달 출범 예정이었던 국가바이오위원회가 무기 연기되었고, 12개의 과학기술분야 정부 연구기관의 원장 선임도 줄줄이 미뤄지고 있다. 한 마디로 국가의 과학기술 연구와 첨단산업 진흥 기능이 정지된 것이다. 세계는 빛의 속도로 변하고 각국은 온 힘을 다해 뛰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정치 때문에 손발이 묶여 있다.

물론 비상계엄 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들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공동체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소를 키우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일반 국민의 생활 기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4차산업혁명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어서 잠시의 정체도 향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루빨리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민의 에너지를 좀 더 건설적인 면으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비상계엄의 후폭풍을 정리하고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권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정치인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우선 상식에 기반하여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계엄 선포에 앞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 거의 모두가 반대 의견을 내었다는 것이 그 증표다. 심지어 많은 사람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최근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하는 한덕수 총리 등 계엄심의 국무회의 참석자들에 대한 탄핵 추진 또한 상식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위기를 수습하기보다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같은 당에 속한 김부겸 전 총리조차 “과하다”라고 평했을까.

또한 최소한의 염치(廉恥)는 지켰으면 한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데, 예로부터 동양에서 공직자들의 주요 덕목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관포지교의 관자(管子)가 지은 목민편(牧民篇)에는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나라를 지탱하는 기본 덕목’이라는 말이 나온다. 앞으로의 정국은 대통령 선거 시기를 놓고 여와 야의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이 싸움 자체는 불가피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양측 모두 최소한의 양식과 염치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국가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염치없이 자기 당의 이익만 생각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적으로 보지 말고 선의의 경쟁자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치가 관용과 타협의 예술이 아니라 진영 간의 사생결단식 대결이 된 지는 꽤 되었다. 이번 사태도 이런 태도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전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치인들이 민생을 챙길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는 그 전투에서 누가 이기느냐보다 민생이 더욱 중요하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은 “소는 누가,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은 며칠 전 열린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질문을 한참 동안 해왔다고 말하였다. 이번의 비상계엄 사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21세기 한국에서 어떻게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반면 국회의 발 빠른 대처와 시민들의 참여로 짧은 시간 안에 계엄이 해제되었을 때 많은 외국인은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특히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영문도 모르고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 대부분이 사려깊게 행동한 것이었다.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은 교양과 상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21세기 한국의 정치인들은 앞으로 전개될 정치 상황에서 상식과 염치로 무장하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물론 또 한번 크게 실망할지 모르지만, 한번 기대해 보고자 한다.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기에.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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