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2 (목)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통곡할 만한 방 없소?”…‘계엄 광주’에 절규한 오지호 최대 규모 회고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전시장 들머리. 1982년 오지호 화백이 별세할 당시 만든 데드마스크를 놓은 진열장을 중심으로 그가 일본 도쿄예술학교를 졸업하며 남긴 자화상과 다른 조선인 재학생 동료들의 자화상이 당시 스승이었던 일본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과 함께 주위에 내걸려 있다.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디 혼자 들어가 통곡할 만한 큰방 없소?”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 계엄군이 계엄령 철폐를 외치는 광주 시민들을 총검과 군홧발로 짓밟은 직후였다. 당시 70줄을 넘은 남도화단의 원로 대가 오지호 화백은 30살을 갓 넘긴 시인 조정권을 만나 비통하게 물었다. 그해 봄 서너달 유럽 미술여행을 하는 동안 벌어진 광주의 참상을 귀국 뒤 접한 터였다. 그는 자책하며 전율하다가 시인이 편집장으로 일하던 문화예술잡지 ‘공간’의 서울 원서동 사옥 편집실을 찾아갔다. 그를 영접하며 슬픔을 나눈 조 시인은 화가의 말을 토씨 하나하나까지 기억해 훗날 자신의 시 속에 되살려낸다.



‘나 일하던 공간 편집실로 찾아온 오지호 화백/ 수염 모시고 사랑방으로 내려간다/ 저 수염, 광주 사람들이 무등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수염… 그동안 유럽에서 서너달 계셨다 한다/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요/ 그애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이 사옥에 어디 혼자 들어가 통곡할 만한 큰 방 없소?/ 수염 부축하며 배웅해드렸다/ 하늘이 살려놓은 저녁해가 인사동 골목길에서 머리 쾅쾅 부딪고 있다/ 혼자 통곡할 수 있는 방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없다, 시인뿐이다’



한겨레

오지호의 1964년 작 ‘열대어’. 푸른 물속을 헤엄치는 빨간 열대어 모습을 반추상적인 거친 터치의 붓질로 묘사한 만년기의 수작이다.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 자택 앞의 따사하고 푸른 빛 햇살 아래 풍경을 담은 명작 ‘남향집’의 작가이자 한국적 인상주의의 대가로 한국 미술사에 아로새겨진 거장 오지호(1905~1982)는 시대의 변화와 질곡을 외면하지 않았던 지식인이었다. 일본 도쿄예술학교에서 서구 인상주의 화파를 치밀하게 수련한 이 대가는 이 땅의 자연과 경물을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인상주의적 시선으로 포착하려는 평생의 화두를 언제나 갈고 닦으면서도 시대를 움직인 풍상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민족전통문화의 본향 중 하나인 경기도 개성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남향집’과 ‘사과밭(임금원)’ ‘사양’ 등의 조선 인상주의 명작을 잇따라 창작하면서도 일제의 창씨개명과 전쟁기록화를 거부하고, 해방 뒤엔 진보적인 미술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에 이끌려 남부군 빨치산 부대에서 그림 활동을 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삶들은 그림 속에 속속 스며들었다. 오지호의 파랑, 오지호의 보라라고 일컫는 해맑고 우아한 그의 색채 풍경 속에는 질풍노도의 세월을 겪은 예민한 감성의 색조와 색면이 어려있는 것이다.



한겨레

오지호 작가의 초창기 대표작 중 하나인 1927년 작 ‘사양’.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 말기인 1939년 월북작가 김주경과의 국내 최초 2인 컬러화집 발간으로도 근대미술사에 굵은 자취를 아로새긴 남도화단 거장의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 ‘오지호와 인상주의’가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지난달부터 열리고 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 이래 거의 40년 만에 열리는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 전시인데다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초창기와 말년기 작품들이 대거 공개되고 작가의 연대기에 대한 다채로운 아카이브 자료들이 추가된 기획전이다.



1부 ‘인상주의를 탐색하다’(1920~1945), 2부 ‘남도 서양화단을 이끌다’(1946~1970), 3부 ‘한국 인상주의를 구현하다’(1971~1982)로 꾸려진 이 전시는 무엇보다도 작품 구성이 과거 어느 전시보다 다채롭다. 들머리는 1982년 오지호 화백이 별세할 당시 만든 데드마스크를 놓은 진열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가 도쿄예술학교를 졸업하며 남긴 자화상과 다른 조선인 재학생 동료들의 자화상이 당시 스승이었던 일본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과 함께 데드마스크 주위에 내걸린 풍경을 선보이며 관람 동선이 풀려간다. 원색화집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에 수록된 ‘처의 상’, ‘임금원’과 국가등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향집’(1939) 등 청장년 시절의 대표작들이 우선 나오고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광주 무등산 자락 지산동에 본거지를 두고 산과 항구·배를 그린 바다 풍경, 꽃과 식물, 열대어 등 남도화단을 이끌었던 시기의 주요 작품들도 대부분 나왔다.



한겨레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중 일부인 1980년 작 ‘복사꽃 있는 풍경’.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따로 꾸린 아카이브 공간에서 형인 오진의 드로잉을 비롯해 잘 보이지 않았던 인물, 풍경 드로잉, 그리고 54년 작업한 아미타후불탱 불화 등을 볼 수 있다. 거장의 화업을 이어나간 아들 오승우(1930~2023), 오승윤(1939~2006), 장손 오병욱(1958~)의 구작, 근작들도 흥미로운 비교 감상거리다.



3부 말미에서는 작가에게 새로운 영감과 창작 의욕을 불어넣었던 1974년과 80년 유럽·아프리카 기행의 산물인 여러 풍경인물화 등도 선보였다. 특히 ‘베네치아 풍경’이나 ‘세네갈의 소년들’은 미완성 작품으로, 기존 인상주의 화풍과는 다른 예리한 필치의 선묘와 관찰력이 돋보이는 주목작들이다. 1부에서 ‘남향집’과 앞뒤 쌍을 이뤄 나온 1964년 작 ‘열대어’는 푸른 물속을 헤엄치는 빨간 열대어 모습을 반추상적인 거친 터치의 붓질로 묘사한 만년기의 수작이란 점에서 눈을 떼기 어려운 이 전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한겨레

1982년 그리다 타계해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유작 ‘세네갈의 소년들’. 1980년 유럽·아프리카를 기행했을 당시 세네갈에서 만난 소년들을 사생한 기록이다.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의미와 보는 재미를 두루 갖춘 전시지만 도쿄 유학 시절 인상주의에 천착하게 된 계기, 2인 화집 제작 당시의 여러 정황과 해방공간·한국전쟁 시기의 화력, 이후 한국적 인상주의의 만개 과정 등 여러 변곡점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반영되지 않은 점은 한계로 남는다. 내년 3월2일까지.



광양/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