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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진정한 민주혁명, 배반당하지 않을 시민 정치 체제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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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섭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12.3 사태에 놀란 정치권이 신속한 대응을 하고 있다. 5.18의 트라우마를 이미 경험한 시민들은 이 사태에 큰 충격을 받고 독재로의 전환이 재발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는 모습이다. 권력자 한 사람의 판단이 국가 기능과 헌법 질서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좌우하는 불안정한 정치 체제의 한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있다. 일단, 일어난 큰불은 끄고 봐야 할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제인지 왕정인지 모를 작금의 정치체제에서 192석의 거대 야당으로도 행정부의 폭거를 견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아울러 민의를 세밀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정당제도에 대한 실망도 커지고만 있다. 대안정치의 구원투수가 절실하다.

왜 촛불의 성과를 제도화시키지 못했을까?

우리는 지금의 정권을 탓하기 전에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과 달리 어떻게 주권자들의 시대적 개혁 요구를 받들지 못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그 결과 시대적 소명 완수는 고사하고 오늘의 사태를 야기한 세력에게 어떻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대의제 정치체제에서 선택받은 정치 엘리트들은 주권자를 그다지 의식하지도 않고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가?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국민의 뜻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책임을 방기하거나, 위임자 위에 군림하거나, 심지어 주권자를 위협까지 하도록 허용하는 ‘대의정치체제’의 폐해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실효적 대안을 찾아야 할 때다. 언제까지 촛불시위와 혁명, 그리고 배신의 아픔과 자괴감, 그리고 반동 권력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 것인가?

대의정치의 불안정성과 모순에서 벗어나 주권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중요 정책 결정이나 정치적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의정치 제제를 효과적으로 보완하여 주권자의 뜻을 실효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시민의회 제도가 유력한 방안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대의정치의 한계를 보완해 줄 정치제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정당제도의 민주화, 비례선거제도의 확대, 직접 민주주의를 가미한 국민 발안과 국민소환 제도의 도입, 인터넷 투표 등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전격 도입 등이 그것들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런 대안들은 각각 장점들도 있으나 기성 정치권에서의 유·불리 판단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 부작용에 대한 우려 등으로 도입이 주저되고 있다. 이 와중에 비교적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시민의회는 기성의 대의제도를 주축으로 주권자의 참여폭을 넓히면서도 숙의토론에 의한 신중한 정책 결정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이다. 나아가 대의제도가 안고 있는 엘리트의 독선과 힘 있는 이해집단의 전횡을 막을 수도 있는 가치중립적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캐나다나 아일랜드 등지에서 활발하게 실험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외세와 독재에 대한 지난한 투쟁과 숭고한 희생, 세계사적으로 빛나는 민주화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퇴행이 계속 일어나는 이유는 정치체계의 모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독선적 엘리트 기득권 세력이 민중이 성취한 자유와 민주의 열매를 독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시민의회, 생활민주주의와 사회혁신을 위한 도구

이런 관점에서 현행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점진적 보정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심의참여민주정치제도인 시민의회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이 시민의회 제도는 달(Dahl)이나 구딘(Goodin) 같은 저명한 학자들은 물론, 유수의 국내외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적극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련 학자들과 복지국가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지역정당, 협동조합, 마을대학 등의 활동과 함께 생활민주주의를 넘어 대안적 정치제도로의 제도 도입과 실행 경험 축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내면을 살펴보면 시민의회의 효과와 성공 가능성 심증이 더욱 커진다. 우리나라 시민들의 높은 민주화에의 열망,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된 높은 도덕성, 그리고 케이 컬처(K-Culture)로 불리는 한류의 품격, 높은 창의력과 지능, 공동체에 대한 헌신적 태도, 이번 12.3 계엄 사태를 막는 과정에서도 나타난 민주화 투쟁의 경험 등은 시민의회를 도입하여 꽃피울 수 있는 최상의 토양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를 기반으로 지금 시도되고 있는 활발한 논의와 실행 경험들이 결합한다면 세계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새로운 케이-민주주의(K-Democracy) 정체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한 시민 저항운동과 혁명의 열매가 어느 날 반동 세력에 의해 퇴행하기를 반복해 온 반민중적 역사의 막을 내리게 할 수 있는 유용한 정치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2.3 계엄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시민이 이룬 촛불혁명의 위대한 성취를 시민 주권을 강화하고 시민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제도화로 전환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무소불위의 기득권 집단을 허용하는 불공정한 검찰과 언론제도를 개혁하라는 지상명령은 대의제 정치체제에서 승리한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공공연히 묵살되거나 폄하되었다. 세밀히 살펴 서민의 삶을 고양해야 할 민생정책들은 무책임한 인사에게 맡겨져 무참히 실패하였다. 급기야는 무능하고 무도한 세력의 집권을 허용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촛불 정부의 정치엘리트들이었다. 이 아픈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시민은 무도한 정권의 농단에도 다시 촛불 들기를 망설이고 있다. 광화문의 인파가 예전과 같지 않은 이유이다. 추첨식 시민의회의 창안자인 달(Dahl)은 "대의 민주주의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엘리트들이 공공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어떤 것이 공공선인가에 대한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오히려 공공선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협소한 관료적・제도적・조직적・집단적 이익을 증진하려 하며, 대중의 시선과 판단에 구속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권력의 유혹에 의해 스스로 부패할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이지문 2017).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정치엘리트와 정책관료들과 그들에게 기생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프레시안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및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관련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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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촛불의 성과를 제도화할 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는 국가 중심 개발독재정권 하에서 시민의 피와 땀과 헌신으로 빛나는 산업화의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유신으로 대변되는 권위주의 독재정체가 도입된 이후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통해 국민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 민주화를 어렵게 이루어 냈다. 이른바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통한 문민정부 수립이다. 이것이 직접 선거를 통해 뽑은 대통령에게 국민의 주권을 일정한 기간 전적으로 위임하는 방식의 대통령중심제 민주주의 정체이다. 이와 함께 소선거구제하에서 선출된 민의의 대표들이 주권자를 대신하여 행정부를 견제하고 법을 만들도록 하는 대의민주주의 정체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와 소선거구제에 의한 대의민주주의 정치제도는 가치와 이념보다는 지역적 대결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가치를 대변하기보다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적 독선을 강화할 뿐이었다. 그 폐해는 오롯이 주권자들이 감수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2017년 겨울의 촛불혁명을 성공시켰다. 주권자의 명령으로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위임받은 촛불정권은 검찰·언론개혁으로 대변되는 핵심 정치개혁들을 정치 공학적 계산만을 앞세우다 무산시켰다. 부동산 투기 억제와 노동생산성 강화, 저출산 대책의 레버리지가 될 있는 핵심 민생과제인 서민주거대책은 무능하고 용감한 내편 인사에게 끝까지 맡겨 23번의 제도 변경을 하는 등 무책임한 정책을 고집하면서 좌초시켰다.

이는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르던 선량한 시민과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배신감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지지자들, 특히 실망한 젊은이들의 대거 이탈이 발생했고 그 반동으로 개혁 대상이던 정파가 재기할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허약한 대의정치 체제가 역사적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준 주권자를 실망시키고 청산 대상인 정치집단을 다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시킨 것이다. 촛불 시민들로부터 촛불 정신과 가치의 제도화의 소명을 위임받은 자들이 주권자 시민의 뜻을 어떤 과정을 거쳐 배반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역사의 반동이 일어나는지, 그 폐해가 어떠한지 우리는 절절히 체험하고 있다.

대의정치체제의 허약함, 즉 대의정치가 주권자의 뜻을 반영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들을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위 정치공학으로 일컬어지는 선거에서 이기는 기술, 즉 대의정치에서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전략(정략)이 주권자의 뜻을 경시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는 지난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때 거론한 이유였고, 어떤 개혁법이라도 통과시킬 수 있는 절대적 힘을 갖고 있었던 거대 여당체제에서도 정부여당이 개혁입법에 미온적으로 나온 대표적 항변이었다.

그런 대통령과 여당의 인식의 중심에는 검찰이나 언론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의 뜻을 따라 개혁을 밀어붙이다가 다가올 지방선거에 역풍이 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차기 대선에 유리한 지지도와 절대적 정당 지분을 가진 여당 대표가 무리한 정치구도를 만들지 않으려는 야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모두 대의정치체제에서 정치 공학적 계산을 앞세워 주권자의 뜻과 시대적 요구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개인의 주권과 의사를 표명하고 결집할 많은 수단들을 가지게 된 개별 주권자들의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개혁의 실패, 책임 정책의 실패는 지지자들의 지지 철회로 끝나지 않고 반동 세력의 재등장으로 귀결되었다. 대의정치체제가 역사적 퇴행을 초래하고, 개혁 대상이 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 역사의 반동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이제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아니 고민만 하지 말고 대안 정치체제를 찾고 도입하기 위해 주권자 시민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주변의 환경을 고려하고 주권자 시민들의 특성에 맞는 대안정치체제를 찾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렇다면 현 대의정치체제의 한계를 실효적으로 보완할 수 있고 무리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나라 시민들의 특성과 체질에 맞는 보완적 정치제도를 적극 모색하고 도입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 시민의회제도가 유력한 대안이다.

다시 촛불을 들고 좋은 정치와 정책을

우리 주권자 시민들은 더 이상 엘리트 대의정치의 들러리로만 존재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 대선을 통해 평생 복지국가 정책 개발과 정착에 헌신해 온 몇몇 정치인들이 정책노선의 차이나 개인적 선호가 다르다는 이유로 유력하고 유능한 정치 지도자를 매몰시키는 싸움을 그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결국 그들의 의도는 성공했으나 반동 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그간 추구하던 보편적 복지국가는 10년 이상 뒤로 후퇴했다. 그의 복지국가의 이상은 한 순간 퇴색하였고 그간 노력의 의도조차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정치는 정책을 낳는 산모다. 유럽은 경제학을 경제학(Economics)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으로 부른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좋은 경제학을 아는 학자들이나 정책가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내전과 외세의 간섭 같은 정치 불안과 기득권 집단을 유지시켜주는 정치체제 때문이다. 주권자 시민이 복지국가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좋은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정책은 좋은 정치에서 나온다. 주권자 시민을 위한 좋은 정치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좋은 정치체제를 그 나라의 주권자들이 만들어 내야 한다.

기득권 엘리트 정치인들은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민초들,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한다. 만들 수 있다. 다시는 4.3, 5.18, 12.3 같은 숫자들이 한강 같은 작가의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노벨상 작가 한강은 너무 자랑스럽다.)

[이재섭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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