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김승민 큐레이터는 영국 왕립예술학교 박사로 서울, 런던, 뉴욕에서 기획사를 운영하며 600명이 넘는 작가들과 24개 도시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미술 시장의 모든 면을 다루는 칼럼을 통해 예술과 문화를 견인하고 수익도 창출하는 힘에 대한 인사이더 관점을 모색한다.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로 벽에 붙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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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탈리아)의 작품 ‘코미디언(Comedian)’이 620만 달러(약 86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일각에서는 ‘미술시장 회복 신호’로 해석했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억만장자들이 견인하는 1차 시장, 그리고 ‘트로피’처럼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한 작품만 있을 뿐이다. 더 넓은 의미의 미술시장은 여전히 하락세다.
620만 달러 바나나를 가능케 한 진짜 힘은 ‘밈’에 있다. 밈은 소셜 및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문화적 아이디어, 행동, 스타일 또는 트렌드를 의미한다. 이 바나나는 신흥 크립토(코인) 부자들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찾는 새로운 트로피의 완벽한 상징이다. 이들의 부는 종종 그들이 구매한 예술 작품처럼 덧없을 수 있다. 카텔란의 바나나는 전통 예술의 경계를 넘어 단순함을 통해 문화적 논평, 유머, 풍자를 전달하는 점에서 밈과 같지만, 크립토 졸부를 만나는 바람에 가치가 과장됐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황금변기 작품. 구겐하임미술관 홈페이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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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은 1960년 이탈리아 파두아에서 가난한 부모 아래 태어났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1990년대에 예술가 경력을 시작했다. 점차 미술계에서 인정받았고, 2011~2012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이 로툰다(Rotunda·나선형 모양의 전시장) 천장에 매달렸다. 이후 은퇴를 선언했지만 2019년 18K 금으로 제작된 실제 화장실 변기 ‘아메리카’를 들고 다시 돌아온다. 아메리칸 드림의 화려함을 조롱하며 관람객이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화장실에 설치됐지만, 전시 중 도난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마이애미 아트 바젤 아트페어에 테이프로 벽에 고정한 바나나를 선보였다. 그가 정의한 작품 수는 단 3점. 그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증명서만 있다면, 어느 바나나를 붙여도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각각 12만~15만 달러에 판매됐고, 이 내용은 수많은 ‘밈’으로 확산됐다.
중국 출신의 암호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이 지난 11월 29일 홍콩의 한 행사에서 벽에 덕트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를 떼어 먹고 있다. 홍콩=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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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이 특별한 이유는 밈 문화와 ‘크립토 졸부'의 부상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매 직후, 중국 출신의 가상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은 자신의 트위터에 낙찰 소식을 홍보했다. ‘코미디언’이라는 이름의 암호화폐도 출시됐으며, 작품의 바이럴 효과를 활용한 사례로 보인다.
이 모든 일은 뉴욕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는 110명의 억만장자가 거주한다. 이들은 경매 전 전시된 작품을 굳이 보러 갈 이유도 없었다. 바나나는 화면 속에서도 충분히 소비 가능한 시뮬라크르(예술 모조품)의 시대를 상징하기 때문에, 600만 달러 바나나는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다. 이는 밈, 사회적 비판, 변화하는 부와 문화의 역학을 나타낸다. 밈은 이제 최고의 통화가 되었고, 기술, 유머, 바이럴 아이디어의 힘으로 움직이는 현대 미술의 진화를 보여준다.
김승민 슬리퍼스써밋 & 스테파니킴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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