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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시민들 “선진국 대열 오른 한국, 순식간에 후진국으로 떨어진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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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담화 발표에 환호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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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촉발한 ‘계엄 사태’가 이어진 지난 3일 심야와 4일 새벽, ‘45년 만의 비상계엄’을 마주한 시민들은 “무장 계엄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고 충격을 호소했다. 올해 한국은 K팝·드라마·방산의 세계적 성공에 더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까지 겹치면서 ‘경제·문화·군사적으로 5000년 역사상 가장 융성한 선진국이 됐다’는 안팎 평가를 받았다. 시민들은 “그런데 순식간에 군부 반란이 판치는 아프리카·남미의 후진국 같은 모습을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방영한 꼴이 됐다”며 “수치와 분노를 견딜 수 없다”고 했다.

4일 새벽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 일대는 계엄 반대를 위해 달려온 시민들이 급히 주차한 차량으로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교통은 대부분 통제됐고 노들로 일부 구간까지 차량이 주차돼 있어 ‘무정부 상태’처럼 보였다. 시민들은 “비상계엄으로 사회질서가 무너졌다”며 불안해했다. 여의도 일대는 군 장갑차와 경찰 차량, 인파가 엉켜 아수라장이었다. 시민들은 “이게 2024년 선진국이라던 대한민국이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2023)에 빗대 12·34 ‘서울의 밤’이라고 칭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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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한 시민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관련 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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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만난 한 60대 시민은 “북한과 엄연히 대치 중인 분단국가에서 군 최고 통수권자가 안보를 갖고 장난을 했다”며 “이 상황에서 북한이 남침이라도 했다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대학생 김모(23)씨는 “군인들이 찬 소총에서 진짜 실탄이 발사될까 봐 두려웠고, 4·19, 5·18 때 이랬을까 싶었다”며 “오늘 계엄군의 국회 진입으로 민주주의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직장인 김모(54)씨는 “전직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헌법과 계엄법도 안 읽어보느냐”며 “민주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한 상황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될 거란 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일부 시민은 “윤석열·김용현·박안수를 당장 내란죄로 구속하라” “국민의힘은 향후 50년간 집권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성을 질렀다.

전날 일찍 잠들어 4일 아침에야 상황을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황당’ ‘충격’ ‘분노’였다. 대학생 최모(24)씨는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 먹고 10시에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어제의 대한민국이 아니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여의도 증권사에 근무하는 문모(25)씨는 “출근 전 환율·주가가 예측이 안 돼 정말 전쟁이라도 터졌나, 악몽이라도 꾸고 있나 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 수색’ 같은 ‘포고령’에 “하룻밤 만에 지금 군부독재 시대로 돌아간 것이냐”고 했다. 윤 대통령이 4일 새벽 계엄 해제를 수용하면서 ‘새벽인 관계로’ 국무회의가 미소집됐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국민 기본권을 마구 제한하면서 내각은 잠자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서울 광화문 직장인 최모(31)씨는 “계엄사가 카카오톡을 검열할까 봐 바로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며 “국격이 순식간에 후진국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한 직장인은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텔레그램 가입 알림이 12개나 연달아 오는 등 새 가입자가 폭주했다”며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가짜 뉴스 잡는다고 판칠 수 있으니 발언을 조심하자’고 입을 모았다”고 했다. 일부 마트·편의점에선 생수·라면·쌀 등을 사재기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인터넷 쇼핑몰에선 “계엄령 대비 생필품을 쟁여두세요” 등 광고 알림도 울렸다.

계엄이 발효된 3일 심야, 수도방위사령부는 물론, 강원·경기 전방 부대에까지 “우리 아들 잘 있느냐”고 묻는 부모들의 전화가 수십 통 걸려왔다. 전방의 한 부대에서 당직 근무를 선 한 부사관은 “지휘통제실과 행정반을 막론하고 부대원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쇄도해 업무가 마비됐다”고 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한 변호사는 “아들이 반란군이 될까 봐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다”며 “군 통수권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했다.

해외 이민자·유학생 등은 본국의 안전을 우려했다. 미국의 한 대학 박사과정 유학 중인 김모(25)씨는 “미국인 교수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 ‘귀국이 어려워지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 도와주겠다’고 해서 갑자기 난민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고, 프랑스 이민자 정모(49)씨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오징어 게임’ 퍼포먼스가 열리고 하루 뒤 계엄이 터졌다”며 “파리 거리에서 한국어가 들리고,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며칠 뒤인데 이게 무슨 폭거냐”고 했다.

영국 런던 유학생 고영훈(32)씨는 BBC 속보로 비상계엄 소식을 들은 뒤 처음엔 ‘오보’라고 생각하고 한국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고씨는 “진짜 북한이 쳐들어왔는지, 서울 노원구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한동안 받지 않으셔서 가슴을 졸였다”며 “계엄이 해제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학교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인 황모(26)씨는 “비상계엄 속보를 보는 순간 ‘나라가 망했나’ 싶더라”며 “현지인 친구가 ‘한국의 대통령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민망했다”고 했다.

[박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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