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과 충북 옥천 사이에 지빠귀 둥지처럼 들어앉은 마을을 두 쪽으로 가르며 관통하던 신작로. 박씨는 신작로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집을 얻어 이발관을 냈다. 농사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마을사람들의 아들들이 도시로, 중동으로 돈을 벌러 떠나던 시절이었다.
신작로에는 제법 규모가 큰 방앗간과 가게가 꼭 붙어있었다. 방앗간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은 보름달처럼 노란 양철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가게로 향하곤 했다. 버스를 타고 면 소재지까지 나가 이발하던 사내들은 제법 버젓한 박씨의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고 수염을 다듬었다. 아이들도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마 후 사내아이가 박씨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에 의하면, 군대시절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병이 들자 아내가 아들을 떼놓고 집을 나갔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안 친구는 박씨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총각이던 이발사 박씨는 친구의 아들을 데려와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아들로 삼았다. 30대 초반으로 말수가 적고 순한 박씨는 훤칠하고 인물이 좋았다. 흰 가운을 입고 신작로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은 제법 근사했다.
하루 두 차례 버스가 신작로를 지나갔다. 옥천 쪽으로 가는 버스는 이발소를 조금 지나 혹은 조금 못 미처 정차했다.
봄이 되고 신작로로 흰 상여가 지나갔다.
가을이 되고 방앗간의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참새들이 방앗간 양철지붕과 전선줄에 빼곡히 내려앉았다.
어느 날 신작로에 웬 여자가 고만고만한 아이 넷을 데리고 나타났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머리를 파마하고, 부지깽이처럼 마른 여자는 방 하나를 얻어 아이 넷과 마을에 정착했다. 여자는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함구했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젊은 여자가 아이를 넷이나 달고 친척 하나 없는 낯선 마을로 흘러들었는지 또한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 말고 여자에 대해 짐작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씨에게 아내가 없다는 걸, 박씨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여자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발관으로 향했다. 박씨는 여자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네 아이를 조용히 제 식구로 받아들였다. 둘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부부로 살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이발사와 여자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자, 박씨가 불임이라는 소문이 잠깐 마을에 돌기도 했다.
하루 세 차례 버스가 신작로를 지나갔다. 네 차례, 다섯 차례, 여섯 차례. 박씨는 한결같이 말수가 적고 순했다.
눈 깜짝할 새 50여년이 흐르고 ‘마음교차로’라는 표지판이 신작로에 내걸렸다. 미루나무는 진즉에 베어지고 없었다. 방앗간도 10년도 더 전에 뜯겨 없어지고 조립식 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신작로로 흰 상여가 나가던 풍경은 흑백사진 속 풍경이 됐다. 신작로 주변으로 물류 창고와 가내수공업 공장과 비닐하우스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발관 간판이 사라지고 편의점 간판이 떠올랐다. 편의점 주인은 여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편의점에서 콜라나 라면 같은 걸 사갔다. 쉰 살이 넘은 아들은 때가 되자 버스를 타고 박씨를 떠났다. 여자의 아이들도 자라서 하나둘 버스를 타고 떠났다. 여든이 넘은 박씨는 여전히 말수가 적고 순했지만 가위를 들지 못할 만큼 몸이 늙고 쇠약해졌다. 박씨와 여자의 등장을 지켜봤던 마을사람들은 긴 세월 동안 여자의 친인척이 여자를 찾아오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여자의 과거는 여전히 비밀에 묻혀있었다. 여자가 세상을 떠났다. 여자의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박씨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요양원으로 갔다는 소식만 여자의 딸 입을 통해 전해져왔다.
김숨 소설가 |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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