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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가진 건 카메라뿐" 맨몸의 영웅들, 계엄군 막았다…국회 지킨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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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담화 발표에 환호하고 있다./사진=(서울=뉴스1) 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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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44년만에 처음으로 선포된 12·3 비상계엄은 국회의 해제 요구안 가결로 2시간여 만에 힘을 잃었다. 역사의 현장에는 시민들이 있었다. 계엄령 선포 소식에 자발적으로 서울 여의도 국회 앞으로 모인 시민 수천여 명은 총을 든 계엄군을 맨손으로 막아섰고 국회의원들이 국회 경내에 진입할 수 있게 길을 만들었다. 국무회의를 거쳐 계엄이 해제되는 순간까지 시민들은 국회를 지키며 새벽을 맞았다.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해낸 주인공이었다.


시민 4000여명, 소총 등 계엄군에 맨손으로 맞서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브리핑을 통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 20여분 만인 3일 오후 10시 50분쯤 경찰은 국회 정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통제했다.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11시30분쯤 국회 앞 대로에는 1000여명이 집결했다. 이후 몇 분 사이에 숫자는 4000여 명으로 불어 차량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국회대로를 가득 메웠다. 시민들은 "윤석열을 체포하라" "계엄철폐 독재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국회 사무처 등에 따르면 계엄군은 이날 밤 11시48분부터 4일 새벽 1시18분까지 24차례 헬기를 동원해 무장 병력 230여명을 국회 경내로 진입시켰다. 별도로 계엄군 50여명이 담장을 넘어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군용차량을 막아서기도 하고 담장을 넘어 국회 청사로 진입하려는 계엄군을 끌어 내리기도 했다.

결국 계엄군은 이날 새벽 1시 본회의에서 결의안이 가결된 후 약 1시간에 걸쳐 전원 철수했다. 시민들은 군병력에게 길을 터주며 박수를 쳤다.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무슨 잘못이냐" "자식 같은 아이들이 수고했다"고 하기도 했다. 애국가를 제창하거나 "우리가 이겼다"등 구호를 외쳤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는 "국회 앞에 나온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이라고 본다"며 "계엄군은 영장없이 체포와 구금 압수수색까지 가능한데도 시민들이 맨손으로 이들에 맞섰다"고 했다. 이어 "군과 경찰도 명령을 따를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군경의 이런 심리와 시민들의 행동이 결합돼 계엄을 실패로 이끌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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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사진=(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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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전격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로 진입하려는 계엄군 차량을 시민들이 막아서고 있다./사진=(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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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입건 단 한 명도 없었다 "민주주의 흔들릴 때 시민이 나선 것"

3일 늦은 밤 시민이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 계엄군이 속속 국회에 도착했다. 군병력은 4일 새벽 0시10분쯤 국회1~3문을 통해 진입을 시도했다. 이에 출입문 앞에 몰려있던 시민들은 "군인들이 왜 들어가냐"며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막았다.

국회 북동쪽 1문 출입을 시도했던 계엄군 10여명은 시민들에 가로막혀 되돌아 갔다. 국회 남동쪽 2문에서도 담장을 넘어 경내로 들어가려는 군병력을 시민들이 막아섰다. 한 중년 남성은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담장에 오르는 군인을 끌어내렸다. 결국 계엄군은 국회2문 진입도 포기하고 이동했다. 계엄군은 결국 새벽 1시 국회 본회의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자 약 1시간에 걸쳐 전원 철수했다. 국회의원들이 의결권을 행사할 충분한 시간을 시민들이 벌어준 것이다.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는 영상을 찍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섣부른 무력 진압을 막기 위해 SNS를 활용한 것. 1979년 10·26 사태나 이듬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학습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왔다.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군사 정부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벌였지만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무차별 구타 등에 진압됐다. 당시 사진 자료나 뉴스 보도가 부족했고 통신이 차단되면서 국내에선 광주의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은 오랜기간 간첩, 반란군,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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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전0시 50분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하려는 군병력과 시민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사진=이찬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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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안이 가결된 후에도 시민들은 한참 동안 국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날 새벽 5시까지 국회 정문 앞에는 500여 명이 모여 "우리가 승리한다" "윤석열을 체포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50대 여성 A씨는 "내 눈으로 확실히 계엄령이 해제 되는 걸 보고 들어갈 것"이라며 "집에서 뉴스로 볼 수 있지만 사람이 밖에 많아야 대통령에게 압박이 갈 것 같다"고 했다.

최모씨(50)도 "대통령이나 국방부가 해제 선포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옛날 계엄 때 시민들이 많이 다쳤다"며 "사람들이 다칠까봐 응급키트를 챙겨 왔다고 했다"고 했다.

다행히 최씨가 응급키트를 사용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부상을 입은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고, 범법행위로 입건된 경우도 단 한 건도 없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날 시민들의 대응에 대해 "민주주의라는 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흔들린다고 느낄 때 시민들이 나선 것"이라며 "거리 시위에 익숙한 세대는 국회로 나오고 젊은 세대는 온라인 중심으로 현장 소식을 전하고 공유하며 다양한 형태로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sejin@mt.co.kr 김호빈 기자 hobin@mt.co.kr 이찬종 기자 coldbell@mt.co.kr 송정현 기자 junghyun79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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