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인구가 증가하고, 상속 재산 규모가 늘면서 국내 유언대용신탁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위탁자가 금융회사와 생전에 계약을 맺고 재산을 관리해 주다가 계약자의 사망 시 계약 내용대로 자산을 분배·관리하는 금융상품이다. 3일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 따르면 이들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올해 2분기 말 기준 3조5150억원으로 2020년 말 8800억원에서 4배 규모로 성장했다.
박경민 기자 |
배정식 법무법인 화우 자산관리센터 패밀리오피스 본부 수석전문위원은 “은퇴하신 60대 이상 시니어가 주로 찾지만, 최근에는 혼자 사는 40·50세대도 상담이 많아졌다”며 “특히 왕래가 거의 없는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기부나 사회공헌 등으로 의미 있게 쓰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수요가 늘고 있는 건 우선 유언대용신탁이 유언장에 비해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상속계획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공증 같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유언장과 달리, 유언대용신탁은 금융사와의 신탁계약으로 유언을 대체할 수 있고, 법적 분쟁의 소지도 적다. 예컨대 자녀가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미성년 자녀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재산을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그동안 고액 자산가만 가입한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최소 가입금액이 5000만원 이상으로 가입 문턱이 낮아진 점도 한몫하고 있다. 하나금융연구소가 지난 7월 초 발간한 ‘중산층의 상속 경험과 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만이 유언대용신탁을 알고 있었지만,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에는 42%가 가입 의향을 나타냈다.
2006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처럼 한국(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도 유언대용신탁 같은 상품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금융연구소의 ‘일본 상속신탁 비즈니스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일본 신탁시장 규모(수탁고 기준)는 1580조엔(약 1경4853조원)으로 2003년 이후 연평균 6%씩 성장했다. 고령화·저금리 환경에서 재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다음 세대로 승계하기 위한 포괄신탁(종합재산신탁)이 주를 이룬다.
한국에서도 고령층을 위한 다양한 상품이 등장해 금융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치매 신탁’(후견지원신탁)은 건강할 때 재산을 운용해주다가, 치매가 발생하면 병원·간병·생활비 등을 지원한다. 치매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사기를 당하거나 금융 피해를 입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장애인 신탁’은 장애인 자녀를 돌보던 부모가 사망하더라도 자녀가 생활자금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돕는다. 지난달부터는 사망보험금(사망 담보 계약 잔액 882조 7935억원)을 활용한 ‘보험금청구권 신탁’도 가능해졌다. KB국민은행은 반려동물 양육자금을 맡기면, 본인 사후에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양육자에게 양육자금을 지급하는 ‘펫 신탁’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장례를 준비해 자녀 세대나 주변인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상조 신탁’도 있다. ‘이벤트형 신탁’은 사후에 손자·자녀·조카 등에게 생일·대학입학·결혼과 같은 이벤트 발생 시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상속·증여 서비스다.
유언대용신탁 상품 구조. 신탁을 통해 유언으로 재산을 처분하는 것과 유사한 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나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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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금융연구소의 이령화 수석연구원은 “일본은 고령자의 재산이 손자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교육자금증여신탁(최대 1500만엔)과 결혼(최대 300만엔)·육아지원신탁(최대 1000만엔) 등에 증여세 비과세 특례를 부여했고, 특례 기간을 연장해나가고 있다”며 “한국도 정부가 신탁업법 제정 등 제도적 틀을 정비하고, 신탁 자산에 비과세 혜택을 준다면 일반 국민도 노후를 위한 안전장치로 신탁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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