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한수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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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로 영상통화를 하면서 전송된 상대방의 신체를 찍은 영상을 몰래 저장·녹화하는 건 죄일까? 대법원은 죄가 안 된다고 판단했다. 앞서 1·2심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촬영 범죄로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무죄라며 원심을 뒤집었다. 영상통화 전송 영상을 녹화한 건 카메라 등으로 신체를 직접 촬영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인데, 시민의 법감정과 괴리가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 등 총 8개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지난 10월31일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3일 밝혔다.
A씨와 B씨는 2020년 8월부터 3년간 사귀었다. A씨는 여자친구 B씨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B씨가 나체로 샤워하는 모습을 휴대전화 녹화기능을 이용해 촬영하고, 이 영상과 영상을 캡쳐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B씨에게 “소문 내면 사진을 뿌리겠다”는 협박도 했다. A씨는 스토킹, 폭행, 주거침입 미수, 특수재물손괴 등의 혐의도 받았다.
1심은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A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몰래 피해자의 나체 사진을 촬영했다가 이를 유포할 듯이 협박했고 실제로 온라인에 공연히 전시했다”며 “죄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는 A씨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과 성적 수치심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2심도 1심 판단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8개 혐의 중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촬영에 대해선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성폭력처벌법 14조1항은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촬영 대상을 ‘사람의 신체’로 규정하고 있어 영상통화를 하면서 불법으로 녹화·저장한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나체로 샤워하는 모습을 휴대전화로 녹화·저장한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 그 자체가 아니라 A씨의 휴대전화에 수신된 신체 이미지 영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사람의 신체를 촬영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취지의 대법원 판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법원은 2013년 “촬영의 대상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라고 봐야 함이 문언상 명백하다”며 “수신된 정보가 영상으로 변환된 것을 휴대전화 카메라를 통해 동영상 파일로 저장한 것은 피해자의 신체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2017년에도 “성폭력처벌법 14조1항의 촬영 대상은 ‘다른 사람의 신체 그 자체’를 카메라 등을 이용해 ‘직접’ 촬영하는 경우에 한정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피고인의 행위에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직접 신체를 촬영하지 않은 이상 이를 촬영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법조계 여러 인사는 대법원의 이런 판단이 법 조항 입법 취지와도 맞지 않고 시민 법감정과도 괴리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사람이 원치 않는 신체를 저장매체를 통해 촬영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성폭력처벌법 취지와 맞지 않다고 본다. 성범죄 사건 전문 이은의 변호사는 “동의해서 신체를 노출했더라도 피해자가 이를 저장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하지 말라는 게 법 취지”라며 “대법원 판결은 영상통화 녹화 같은 건 촬영행위로 안 보겠다는 것이다. 문제있는 판결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법원이 기계적 법 해석을 통해 범죄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로드맵을 그려주고 있는 형국”이라며 “불법촬영이나 협박 행위가 무엇을 침해하고, 왜 심각하며, 왜 처벌하는지 법 취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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