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거장’ 로버트 윌슨
현대 오페라와 연극 미학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공연 예술가 로버트 윌슨이 서울예대(총장 유태균) 초청으로 방한, 지난 22일 서울 중구 드라마센터에서 강연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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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시작되고 수분간, 로버트 윌슨(83)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객석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이미 1990년대 초에 뉴욕타임스가 “세계에서 가장 전위적인(vanguard) 공연 예술가”라고 불렀던 인물. 경사진 객석 아래 반구형 무대가 있는 서울 중구 서울예대 드라마센터. 생방송이었다면 방송 사고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청중 500여 명 역시 동요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만들어온 이 노(老)거장의 예술 세계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윌슨이 입을 떼자 그제야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저는 처음부터 모든 작업을 침묵으로 시작합니다. ‘햄릿’이나 ‘리어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묵으로 무대에서 배우의 신체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연극의 시작입니다.” 청중은 침묵의 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한 윌슨의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2시간여 강연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연출가, 안무가, 화가, 조각가, 비디오 아티스트, 음향 및 조명 디자이너로 활동한 전설적인 예술가. 대사 없는 7시간 길이 오페라 ‘청각장애인의 시선’(1970)부터, 대표작 ‘해변의 아인슈타인’(1976), ‘푸른 수염의 성과 유산’(1998) 등까지, 윌슨은 관습적 연극 양식을 거부하고 마치 현대미술 작품 같은 무대 위에 상징과 이미지를 쌓아 올리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현대 연극과 오페라 미학은 로버트 윌슨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이달 초에는 그가 연출한 프랑스 국민배우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1인극 ‘메리 스튜어트’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아시아 초연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배우들은 먼저 침묵에 귀 기울이고 무대 위에 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극 수업에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은 배우가 무대에서 제대로 서는 것입니다.” 그는 또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이 극장 안에는 냉방기의 소음, 바람 소리 같은 것들이 있죠. 완전한 침묵이란 없으며, 변화만이 유일하게 변함없는 상수(常數)입니다. 정지된 순간이란 없으며, 매 순간은 움직임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고요히 머무를 때 움직임을 더 잘 인식하게 됩니다. 살아 있는 한, 소리도 존재합니다.”
그는 침묵의 힘에 관해 흑인 소프라노 제시 노먼(1945~2019)이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할 때의 일화도 들려줬다. “9·11테러가 일어난 날이었어요. 제시가 전화를 걸었어요. ‘공연을 못 할 것 같아요. 무대에 섰다가는 그냥 울고 말 거예요.’ 저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라고 말해줬죠. 그날 저녁 무대에 선 제시는 3~4분 노래를 한 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움직임 없이 10분 동안 그저 무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모든 관객이 그와 함께 울었습니다. 침묵은 어떤 말이나 노래보다 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윌슨은 서울예술대학교(총장 유태균)의 인터컬처럴 아츠(Intercultural Art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초청받아 방한했다. 남산 서울예대 드라마센터에서 22일 강연을, 23일엔 서울 예대 학생들과 국립극단 청년단원들을 대상으로 공개 연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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