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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일본은 집단동의·건강보호조처 의무…한국 반도체특별법은 개별동의·시행령에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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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왼쪽 여섯 번째)이 28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한국 반도체 다시 날자\'라는 주제로 반도체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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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산업이 위기라는 이유로 정부와 여당이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법안에 반도체 연구개발 노동자들의 ‘주 52시간 노동상한제’ 적용 제외 등이 포함돼 있어 노동계가 반발하지만,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선택 확대”라며 법안 통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28일 김 장관은 경기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반도체업계·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반도체협회 초청 간담회’를 열어 반도체특별법에 대해 “반도체 연구개발자의 근로시간 선택 확대, 건강보호, 충분한 보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한다면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별법을 통해 반도체업계가 (근로시간에 대한) 상당한 재량을 가지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부가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반도체특별법은 일정 연봉 이상의 반도체산업의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자가 회사와 ‘개별 서면합의’ 하면 주 52시간 근로시간 상한이나 휴게·휴일, 초과근로수당 지급 등에 관한 규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제도는 일본(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이나 미국(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이 도입하고 있다. 경영계는 두 나라를 근거로 도입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겨레가 해당 제도가 규정된 일본 노동기준법, 미국 공정근로기준법 등을 살펴보니 반도체특별법과는 도입 절차와 적용 대상, 건강보호 조처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는 특정 직종의 일정 수준(연 1750만엔) 이상 연봉을 받는 노동자에게 노동시간 상한과 초과근로수당 지급 등의 규제를 적용하지 않도록 한다. 동시에 이를 위한 조건 대부분을 법률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장의 근로자대표를 포함한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성된 ‘노사공동위원회’ 위원 가운데 5분의 4 이상이 찬성해야 제도를 도입할 수 있고, 개별 노동자의 동의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 사실상 ‘집단동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회사가 개별노동자와 합의만 하면 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 반도체특별법과는 차이가 크다.



건강보호 조처 역시 반도체특별법은 통째로 시행령에 위임하지만, 일본은 법률로 건강보호 조처의 내용을 세밀하게 정리해뒀다. ‘근로시간과 사업장 내 체류시간을 더한 시간’(건강관리시간)을 측정해 관리하도록 하고, 건강관리시간 상황에 따라 유급휴가를 주거나, 신체·정신건강 상담 등의 조처를 하도록 한다. △주 40시간을 초과한 건강관리시간을 1개월에 100시간 또는 3개월에 240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 △연차휴가와는 별도의 1년에 연속 2주 이상 휴일 부여 △근로일 사이 11시간 연속 휴식 가운데 하나 이상의 조처도 해야 한다. 그동안 반도체업계에서는 주 52시간 규제에 따른 노동시간 측정이 소모적이라는 취지로 주장해왔지만,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적용하더라도 건강관리시간 관리를 통해 사실상 근로시간 상한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반도체업계는 업무시간 배분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는 대신 실 근로시간과 관계 없이 노사가 서면합의한 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봐 주 52시간 규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재량근로제’에 대해, “노동자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할 수 없어 사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모두 노동자의 재량이 있는 업무에 대해서만 근로시간 규제나 초과근로수당 지급 의무가 면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고도의 전문지식 등을 필요로 하고 업무 성과와 업무시간의 관련성이 높지 않은’ 업무에만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적용할 수 있다. 반면 ‘업무시간과 관련해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업무’에는 적용할 수 없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 제도는 관리직·운영직·전문직 가운데 일정 수준(연 10만7432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주 40시간 초과 노동에 대한 연장근로수당 지급 의무를 면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전문직’의 주된 업무는 ‘고급 지식이 필요하고, 지적인 성격이 강하며 재량과 판단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야 하는 업무’로 규정한다. 적어도 일본과 미국에서는 노동자에게 근로시간에 관한 재량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엔 관련 규제를 면제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정영훈 국립부경대 교수(노동법)는 “일본은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제외하면서도 도입 절차와 건강보호 조처를 매우 구체적으로 법률에 명시하고 있다”며 “근로조건에 관한 내용을 통째로 대통령령에 위임하는 것은 근로조건은 법률로 정해야 한다는 ‘근로조건 법정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부실한 입법”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성명을 내어 “반도체특별법으로 무제한 노동의 길을 열겠다는 정부 발상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겠다는 심산과 다르지 않다”며 “과로 조장법을 막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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