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일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박근혜 퇴진’이라 적은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2016년 11월 촛불집회 때 더불어민주당이 탄핵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대개 “그럴 리가” 하고 반응한다. 민주당이 일찌감치 탄핵 선봉에 선 줄 안다. ‘박근혜 탄핵=민주당 덕’이라고 여긴다. 민주당이 촛불집회 성취를 전유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광장에서 박근혜 수사와 구속을 외치는 목소리가 고조에 이르렀을 때 당시 민주당 고문 문재인은 ‘명예로운 퇴진’, 원내대표 우상호는 ‘질서 있는 퇴진’을 말했다. 서울대 교수를 하던 조국은 ‘탄핵이 불가능한 이유 세 가지’를 주장했다. 탄핵이 국회에서 이뤄질지, 총리 황교안이 권한대행을 맡는 게 옳은지 되물었다. 그는 헌법재판관들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이들은 거리 정치와 의회 정치를 구분했다.
지금 민주당은 거리 정치를 열심히 한다. ‘윤석열·김건희 문제’를 두고 가장 먼저 거리로 나왔는데, 구호는 2016년의 그것처럼 종잡을 수 없다. 당이 내건 공식 구호는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특검 촉구’인데, 특검 임명권자이자 법안 ‘거부권자’가 지금은 윤석열이라는 점에서 특검을 수용하면 대통령으로 용인 또는 인정하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당 공식 입장이 윤석열 탄핵인지, 퇴진인지, 자진사퇴 요구인지, 임기단축 개헌인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사회를 지향할지, 어떤 정치를 구현할지도 빠져 있다.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국민중행동 등이 참여하고, 민주당 등이 연대하는 ‘거부권을 거부하는 전국비상행동’의 ‘윤석열을 거부한다’라는 대표 구호에 담긴 ‘거부’가 무엇인지도 유동적이고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퇴진’ 등을 명시한 여러 시국선언과 구분되는 게 바로 이 모호함과 유동성이다. 민주당 구호들은 ‘이재명 방탄’과 다음 대선 승리라는 목적으로 그때그때 바꾸는 변화무쌍한 정치 계산을 담은 건 분명해 보인다.
시인 김해자는 2016년 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 당도 대통령도 우리의 절대 희망이 아니다”라고 썼다. 윤석열 집권 8개월 뒤인 2023년 1월 낸 ‘꺾이지 않을 결심’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지금은 대통령 하나 바꾸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실감하지 못했던 그때를 후회한다”고 적었다. “소통과 토론을 먹어치우고 충성을 서약하는 자들만을 허락하는 기득권자들의 말과 행위”라는 윤석열 집권 후의 ‘혹독한 대가’ 등을 두고 이렇게 썼다. 김해자가 일찌감치 진단한 ‘윤석열 기득권 집단’의 ‘거짓 언어’는 그 강도는 세지고, 종류는 많아지며, 범위는 더 넓어졌다.
“대통령 하나 바꾸는 게 얼마나 큰일”이란 말에 공감하면서도 지금 체제에서, 지금 대통령 후보 중에서 하나 뽑아 바꾼다고 세상 근본 문제가 바뀌진 않을 것 같다. ‘촛불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 5년의 경험 때문이다. 비정규직·산재·젠더·차별금지 문제 등을 두고 뚜렷하게 해결하거나 진전을 이룬 게 없다. 필리버스터까지 하며 반대한 테러방지법도 그대로 뒀다. 2016년 광화문에서 텐트까지 치고 싸운, 지금도 같은 신념을 가진 여러 사람이 거리에 합류하길 꺼리는 게 바로 저 5년 때문이다.
지금 거리의 정치에서 뚜렷한 건 정파와 진영인데, 희미한 건 ‘체제 문제’이자 ‘자본 문제’다. 올해 3분기 기준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전년보다 3.5% 줄었는데, 그 이유가 건설업 불황 때문이다. 호황이면 많이 죽고, 불황이면 덜 죽는 잔인하고 끔찍한 사회는 박근혜 때나 문재인 때나 윤석열 때나 여전하다. 이 체제대로라면, 이 문제는 다음 대통령 때도 이어진다. 이대로라면, 차별금지법 제정도 뒷전일 것이다. 이재명은 지난달 보수개신교 목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사회적 대화나 타협이 성숙된 다음에 논의해도 되겠다”며 뒤로 미뤘다. 민주당은 이 문제를 15년 동안 ‘미성숙 상태’로 둔다.
2016년 거리의 정치는 구체적이었다. 가장 먼저 광장에 나온 이들은 단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다. 이후 이어진 집회는 재벌 지배, 노동자·농민과 장애인 탄압 같은 문제 해결과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문제를 의제화했다. 박근혜를 가장 강건하게, 가장 앞장서 비판했던 여성들은 “박근혜를 몰아내고, 여성·소수자 차별을 중지시키자”는 슬로건을 내건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무대 위아래에서 벌어진 여성과 장애인 혐오 차별에도 맞서 싸웠다. 병신년(丙申年)을 한 해 앞둔 그해 박근혜를 두고 ‘병신(病身)년’이란 욕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거리 정치를 확산하려면, 윤석열 정권하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더 불러내야 한다. 삶의 문제는 구체적이다. 해결책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한 더 나은 세상’ 같은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겉핥기의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산재로 노동자가 죽으면, 중대재해처벌법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이런 문제가 쌓여 있다.
☞ [기자칼럼]병신년과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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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사회부문장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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