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8 (목)

[김정하 논설위원이 간다] “여론조사 품질평가제 도입해 부실 업체 퇴출하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선거여론조사심의위 여론조사 개선 방안



중앙일보

김정하 논설위원


선거브로커 명태균씨의 공천개입 의혹 사건이 두 달 넘게 정국을 흔들고 있다. 명씨가 김건희 여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 녹취까지 공개되면서 지난 대선 때 명씨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그런데 내세울 만한 뚜렷한 경력이나 배경이 없는 명씨가 어떻게 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에게 입김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그건 명씨가 여론조사를 특정인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데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명태균 사태로 조사 개선론 비등

사전신고 면제 대상 대폭 줄여야

조사품질 공개 유권자 판단 도움

미국선 네이트 실버가 등급 분류

“여론조사 일정 공개 금지해야”

불량 조사업체 퇴출법안 발의도

여론조사는 여론을 반영하는 도구이지만 거꾸로 여론조사가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정치권에선 여론조사 1위 후보에게 더욱 지지 여론이 쏠리는 밴드왜건 효과가 상당히 크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선거철만 되면 각종 메신저와 SNS에 정체불명의 여론조사가 유포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여론조사를 입맛대로 만들어오는 명씨가 선거철에 효용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사전신고 면제 악용 많아

명씨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여론조사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선거여론조사를 감독하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여심위)가 최근 ‘선거여론조사 심의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아직 시안 단계지만 도입될 경우 여론조사 환경에 큰 변화를 가져올 내용이 많아 미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여심위는 여론조사 신고면제 대상을 줄일 것을 제안했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선거여론조사를 실시하려면 조사 개시 2일 전까지 관할 여심위에 서면으로 신고해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는 공표하는 조사든 비공표 조사든 마찬가지다. 만약 여심위가 해당 조사의 설계가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시정을 명령할 수 있다. 다만 신문·방송·뉴스통신·정기간행물 등은 사전 신고 없이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이 있다. 일일 평균 이용자 수 10만명 이상인 인터넷 언론사도 예외를 허용한다. 그런데 이런 예외 규정을 노려 ‘사이비 언론 매체’와 특정 정치인이 짜고 불공정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김영희 디자이너


여심위는 “정기간행물은 비교적 등록이 쉽고 관계 당국의 사후 관리가 부실한 점을 악용해 조사기관이 직접 매체를 운영하거나 조사기관과 결탁해 의뢰받은 것으로 기망하는 사례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여심위는 또 “신고 의무자인 후보자가 언론사와 공모해 신고의무를 회피하고 후보자는 사용할 수 없는 가상번호를 사용해 조사한 뒤 언론사가 조사 결과를 왜곡 보도하고 후보자는 그 보도를 자신의 SNS를 통해 확산시킨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명태균씨의 여론조사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이에 여심위는 “신문진흥법 2조에 따른 신문사업자 중 ‘일반일간신문사업자’를 제외한 특수일간신문·일반주간신문·특수주간신문과 정기간행물 및 일일 평균 이용자수 10만명 이상의 인터넷 언론사에도 사전신고 의무를 부과하자”는 의견을 냈다. 일반일간신문사·방송·뉴스통신은 해당 매체법에 따라 공익성이 요구될 뿐 아니라 대표자·편집인의 자격 요건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불공정 여론조사를 실시할가능성이 작지만, 여타 매체들은 환경이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여심위의 안대로 사전신고 면제가 축소될 경우 22대 총선 271건, 20대 대선 153건, 8회 지방선거 389건의 여론조사가 추가로 신고대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품질인증 공신력 확보 관건

여심위의 제안 중에 또 하나 눈여겨볼 내용은 ‘선거여론조사 품질평가제도’ 도입 방안이다. 지금은 여론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일반 유권자 입장에선 조사의 질을 비교·판단하기가 어렵다. 여심위나 공공성을 인정받는 기구가 각종 여론조사의 품질을 평가해 공개할 경우 유권자의 판단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자연스레 불량 조사 기관의 퇴출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체적인 조사 횟수가 줄어 여론조사 응답률이 올라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여심위는 “조사품질을 높이기 위해 조사설계, 질문지 작성, 실사, 데이터 분석 등 전 과정에서 오류를 통제하기 위해 전문성을 가지고 노력한 조사는 그에 상응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론조사업체 등급제 도입을 주장해 온 서울대 한규섭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미국에서 통계전문가 네이트 실버가 ‘538(파이브서티에이트)’이란 데이터 저널리즘 사이트에서 과거 예측 결과에 기반해 여론조사 업체를 4개 등급으로 분류해 공개한 사례가 있다”며 “우리도 조사업체에 등급을 부여하고 일정 등급 이하의 업체는 일정 기간 조사를 못 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직원 숫자와 매출액 같은 업체의 외형적 규모를 평가 기준에 넣으면 군소 업체의 반발로 제도 도입이 어려우니, 여론조사와 실제 투표 결과와의 오차를 가장 큰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김영희 디자이너


다만 김춘석 한국조사협회 대변인은 “품질인증제의 취지엔 공감하지만 평가의 주체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공신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검토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김 대변인은 여론조사와 실제 투표 결과의 차이를 평가의 잣대로 삼자는 의견에 대해 “한국은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이 있기 때문에 공표된 조사와 투표 결과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또 실제 투표와 달리 여론조사는 기권층의 의견도 반영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심위는 선거여론조사 일정의 사전공개를 금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지금은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이 지지자들에게 “○일부터 ○일까지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있으니 꼭 응답해달라”며 조사 참여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뿌린다. 당내 경선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행태가 여론조사를 왜곡시킨다는 게 여심위의 판단이다. 여심위는 “선거여론조사 일정이 먼저 공개되면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지지자가 조직적으로 조사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특정 성향 표본의 과다 표집으로 인해 선거구 내 조직력이 강하거나 미디어 영향력이 큰 후보자에게 유리한 결과가 도출될 개연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여심위가 공개한 사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9~30일 A 기관이 모 지역구에서 당내 후보 선호도 조사를 했는데 갑 후보 30.0%, 을 후보 21.0%였다. 그런데 올해 1월 11~12일 B 기관의 조사에선 갑 후보 24.4%, 을 후보 30.5%로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여심위는 을 후보가 B 기관 조사에 앞서 선거구민들에게 조사 일정을 알리고 조사 참여를 독려한 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응답자 인센티브 제공 필요

또 여심위는 선거여론조사기관의 등록여건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현행법상 선거여론조사기관으로 등록하려면 분석 전문 인력이 3명 이상 있어야 하고, 상근 직원 수가 5명이 넘어야 한다. 그런데 상당수 기관이 영세하기 때문에 등록기준을 맞추려고 대표자 등 임원이나 친족을 직원 수에 포함하고 있다. 올해 8월 기준으로 49개의 선거여론조사 등록업체 중 대표자가 분석전문인력을 겸임한 곳이 27곳(55%)이나 된다. 여심위는 “등록제의 취지를 감안하면 대표는 명시적으로 직원에서 제외하고, 동업자·친족 등도 근로자 신분이 명확한 경우에만 직원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여심위는 여론조사의 응답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현실을 고려해 여론조사 성실 응답자에겐 인센티브 제공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금도 성실 응답자에게 전화 요금 할인 혜택을 줄 순 있으나 절차가 복잡하고 단순 권고 규정이어서 활용 실적이 전무한 상황이다.

국회에서도 ‘사이비 여론조사’ 퇴출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 박정훈 의원은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등록취소 사유를 기존 ‘선거 여론조사 관련 범죄’에서 공직선거법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확대 ▶부정 여론조사기관의 재등록 불허 ▶선거법·정치자금법 처벌자는 공표용 선거여론조사 수행 금지 등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 의원은 “여론조작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1년 뒤에 다시 비슷한 업체를 통해 여론조작을 되풀이하는 현실을 끊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하 논설위원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